당신은 (부처님이십니다.) 마하반야바라밀.(마하반야바라밀) 대단히 반갑습니다. 오랜만에 뵙죠. 오랜만에 봐야 반갑죠. 그죠. 진관사 도량이 가을로 흠뻑 물들어 있어서, 차에서 내려서 이렇게 둘러보는데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참 좋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달리 표현할 말이 없더라고요, 보니까.
그런데 제가 지금 안경을 벗고 있잖아요. 그 원래 쓰는 안경이 있는데, 아침에 나오면서 그 일상에 운동할 때 끼는 안경을 끼고 와가지고, 색이 변하는 안경 있잖아요, 변색 안경, 그걸 써가지고, 너무 멋있게 보일 것 같아가지고, 안경을 벗고 해야 되겠다. 벗으니까 좋네요. 왜냐 하면은 이것도 참 좋은 게, 잘 보이지가 않네. 그냥 두려운 마음이 사라져요. 무슨 말도 다 할 것 같은데.
오늘은 이제 천수다라니를 회향하는 그런 날이기 때문에, 기도 성취를 위한 세 가지 마음에 대해서 말씀을 드릴까 합니다.
일단은 우리가 기도를 이제 하는데, 우선 기도를 하기 전에 가장 중요한 거는 <생각을 생각해 봐야 됩니다.> 생각을 생각해 봐야 돼. 생각이라는 게 있잖아요. 생각. 누구나 다 생각을 하고 살죠. 근데 요즘에는 생각 없이 사는 사람도 있어요, 또.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이런 말 하잖아요. 생각 있게 살아야 되는데, 생각을 생각하지 않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단 말이에요. 말이 좀 어렵긴 한데, 지금 여러분이 어떤 생각이 있느냐. 여러분의 마음에 생각이 올라오잖아요. 그걸 의식이라고 하잖아요. 의식. 의식은 생멸하는 거란 말이에요. 생멸. 의식은 이렇게 올라왔다가 사라지고, 또 올라왔다 사라지고 하잖아요. 한 생각이 쭉 이렇게 이어지는 사람이 있는데, 그건 죽은 사람이에요. 사는 사람은 생각이든 의식이든 올라왔다 내려갔다 하죠. 그 생각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생각을 생각하고 사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 그냥 살죠. 그래서 이제 우리가 마음 안에 의식 안에 있는 생각이라고 하는 걸 한번 생각해봐야 된다. 그 생각이라고 하는 틀 안에 무엇을 채울 것이냐. 무엇이 채워져 있느냐. 이게 기도의 핵심 포인트예요.
여러분이 지금 눈을 지그시 감고, 평소에 어떤 생각들을 하고 사는지를 이렇게 들여다보면, 그건 옛날 어른들이 뭐라고 했냐면 그걸 자기 살림살이라고 얘기했단 말이에요. 그 마음 생각으로 자기 살림살이를 누구나 다 알아요. 이거는 근데 누구한테도 말하면 안 돼. 자기만 알고 있어야 돼. 왜냐. 말해도 다 군더더기, 자기밖에 모르는 거예요. 그 생각이라고 하는 거 자체를 어떻게 보면 어떠한 것들, 생각이라는 것들을 불교에서는 생각 염자(念)라는 게 있잖아요. 생각 염자. 그 생각이라고 하는 거를 바른 생각을 해야 된다. 그러다 보니까 이제 정념(正念)이라고 표현했어요. 팔정도에서는 바른 생각, 정념. 그걸 뭐 요즘에는 <마음 챙김> 이렇게 번역하는데, 그것도 틀린 번역은 아닙니다마는, 정확한 생각은, 생각은 기억이에요. 기억. 어떤 기억을 해내느냐. 그 생각을 할 때 어떤 생각으로, 어떤 기억으로 내가, 내 생각이 채워져 있느냐라는 거예요. 보통은 과거의 경험으로 인해가지고 내가 그 생각들이 올라오잖아요.
그래서 우리 부처님께서는 그 생각을 6가지로 국한해서 우리 수행 방법을 말씀하셨단 말이에요. 그걸 육념법이라고 얘기를 합니다. 물론 이제 대승의 수행법인데, 육념법, 육념법은 이제 첫 번째는 이제 부처님이잖아요. 부처님을 생각하라 그게 뭐예요? 염불(念佛), 염법(念法), 염승(念僧), 삼귀의 불법 삼보잖아요. 그다음에 또 나오는 게 염시(念施), 염계(念戒,) 염천(念天) ,이렇게 나와요.
그러니까 염시는 뭐냐 하면, 내가 어떻게 베풀고 살 거냐를 생각하라는 거예요. 우리는 이제 그 생각 안 하고, 어떻게 많이 끌어안을 거냐, 많이 벌 거냐, 내 것을 얼마큼 많이 만들 거냐, 이 생각을 하고 살잖아요. 근데 많이 어떻게 하면 내가 베풀고 살 거냐. 그것이 내 육체를 통하든, 나의 물질을 통하든, 나의 마음을 통하든, 어떻게 베풀고 살 거냐.
그다음에 염계예요. 염계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살도음망주(殺盜婬妄酒)도 있지만, 오계 살도음망주도 있지만, 또 삼귀의계(三歸依戒)도 있죠. 이것은 내가 얼마큼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생활을 할 거냐. 쉽게 말하면 양심에 스스로 속이지 않고, 스스로 자기를 속이지 않고, 얼마큼 윤리적인 생활을 할 거냐라는 것을 생각하고 사는 거예요. 기억하고 사는 거. 그게 염계죠.
그리고 염천은 뭐냐 그러면, 하늘이라고 표현했지만, 내가 이생에 이 육신이 사대로 흩어지고 나서 그다음에 어떠한 과보를 받을 거냐. 근데 그 과보를 받는데 천이니까, 하늘이니까 좀 더 좋은 과보를, 좋은 결과물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라는 건데, 그것은 바로 얼마큼 공덕을 지고 살 거냐라는 거예요.
부처님과 부처님 가르침과 부처님 가르침을 닦고 수행하는 수행자들과 그리고 내가 어떻게 베풀고 살 거냐, 그리고 어떻게 윤리적인 생활을 할 거냐, 그리고 어떻게 공덕을 짓고 살 거냐, 이것이 이제 6가지의 수행법 중에 하나였단 말이에요. 그걸 염자를 써가지고 육념법이라고 하는데,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채울 거냐 라는 말이죠. 생각.
그런데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우리는 그걸 업이라고 부르기도 해요. 자기 업에 의해 가지고 그 생각의 틀이 구성되고, 내용물이 구성되고, 또 결과물이 구성돼서 그게 밖으로 송출돼 나오는 거잖아요. 생각이 언어나 내지는 행위로 나오는 건데, 그걸 삼업이라고 표현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업이라고 하는 거는 결과론적인 업이 아니에요. 우리가 우리 업 이렇게 얘기하면은 늘 우리가 이제 착각하는 게 뭐냐 하면 과보라고 생각한단 말이야. 과보, 업은. 근데 업은 현재 진행형이라는 거예요. 불교의 업설은 인도 당시에 있던 업설하고 다른 이유가 뭐냐 그러면, 무게 중심이 어디 있냐 그러면은, 불교의 업설은 지금 내 마음, 지금 이 순간에 무게 중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내가 업이라고 하는 게 있는데 그 업을 추동하는 업보가 있고, 그것이 내가 습관이 돼서 차 있는 그 창고를 업장이라고 하죠. 업장. 그래서 업보, 업장이 있는데, 그것을 내 안으로, 내가 살아있을 때 내 입으로, 내 언어로, 내 행위로 나오게 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그거를 업력이라 해요. 업력. 업의 동력이라는 얘기예요. 이거 이제 우리는 알게 모르게 그런 과정 속에서 살고 있단 말이에요.
근데 그 업력이 되는, 업의 동력이 되는 게 두 가지가 있는데, 그 업의 동력이 되는 것이 하나가 무명이요, 하나는 가래입니다. 가래. 무명은 뭐냐 하면 밝지 못한 거란 말이에요. 밝지 못한 거. 부처님께서 견성하시고 나서, 제일 먼저 이 연기라고 하는 거를 이렇게 순관(順觀)하시는데 그때 첫 번째가 무명을 관하시잖아요. 사람이 왜 생로병사가 있느냐. 역관을 하면은 나중에 무명이 되는 거고, 무명의 순관, 순관으로 순서대로 쭉 하다 보면은 노사까지 가는데, 그때 첫 번째가 무명이잖아요. 지혜롭지 못한 거란 말이에요. 사람이 지혜롭지 못했기 때문에 사람이 생사를 한다는 거예요. 생로병사를 한다. 근데 또 하나가 우리가 업에 빠져드는 이유가 뭐냐. 가래입니다. 가래. 가래는 뭐냐 하면, 어떤 현상들이 그게 좋은 거든 싫은 거든 간에, 거기에 딱 달라붙어가지고 떨어지지 않는, 애착하는 거예요. 애착. 집착이라 하죠. 그걸 다른 말로 이제 가래라고 그러는데 가래는 일종의 번뇌예요. 번뇌. 예를 들면 좋은 거는 계속 내가 취하려고 하는 마음이 있고, 내가 한 번 싫은 사람이 있어요. 가족 관계가 그럴 수도 있고, 이웃과 그럴 수도 있고, 친구 사이에도 그럴 수도 있고, 한 번 싫어지면은 그 사람을 잘 안 보려고 그래요. 잘 안 보려고 그래요. 근데 안 보려고 하면 안 보려고 할수록 어떻게 돼요? 더 내 눈에 나툽니다, 그 사람이. 그게 내 업이라는 거예요.
제가 이제 한 보름 전에 미국을 2주간 다녀왔는데, 저는 이제 미국을 들어가는데, 뉴욕 행사가 있어가지고 들어가는데, 종단 행사가 있었어요. 놀러 간 거 아닙니다. 물론 여행도 했어요. 했는데, 타임스퀘어 참 좋대요. 근데 그 미국을 들어가는데 내가 자리에 쭉 앉았는데, 내 뒷좌석에, 내 바로 옆에 갓난아기가 탄 거예요. 그 비행 시간이 13시간인데, 10시간을 울더라고요. 그것도 이제 좀 장시간이니까, 이제 편하게 간다고 앞에를 탔는데, 앞에가 어딘지 아시죠? 몇 명 못 앉는데. 거기 탔는데 옆에 앉아가지고 10시간을 울어 재끼는데, 나중에 내가 “아, 업보구나.” ‘혼자 평생 편하게 살았으니까 아기를 키우는 게 얼마나 힘든지 한번 경험해 봐라.’ 근데 그 아이가 참 희한하게, 원래 그런가요? 안으면 안 우는데, 놓으면 울더만요. 그래요? 저는 어릴 때 제 큰누이 얘기 들으면, 안아도 안 울고, 놔도 안 울고 했다는데. 10시간 우는데, 내가 마음으로 그때, 이제 처음에는 이렇게 우니까 한두 시간은 그냥 그럴 수 있겠구나. 3시간이 지나니까 단전에서부터 뭔가 쫙 올라와요. 단전에서부터. 그러고 굉장히 예민해져요. 모든 숨구멍이 그 아이의 울음소리로 차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리고 5시간이 딱 지나니까 단전에서 장까지 올라와가지고 장이 뒤집혀요. 밥맛도 없고. 왜냐하면 조용히 살던 사람이. 근데 그 아기가 그냥 우는 게 아니고, 뭐라 할까나 정말로 세게 우는 거 있잖아요. 근데 엄마가 그 누군지, 엄마가 그 아이를 방치해요. 우는데. 아빠가 안아. 엄마, 이러면 또 옆으로 새는데, 어쨌든. 그래서 이제 나중에 한 7, 8시간 지나니까 머리 끝에서 이렇게 뿅 나가더라고요. 뭐가. 그래서 내가 그 순간에 이거 놔야 되겠구나, 이 생각을. 그러면서 이제 마음속으로 마아반야바라밀 마아반야바라밀 마아반야바라밀. 그래서 이제 정근을 하고 있으니까, 애가 울음을 그친 건 아닌데 그다음부터는 내 마음이 요동을 안 치는 거예요. 요동을. 그래서 내가 이게 이것도 하나의 내 마음 수련 과정이구나. 그러고 이제 일정을 마치고 귀국하는데, 똑같이 내가 팔 번이었는데, 육 번에 애가 또 탄 거예요. 근데 그 아이는 단 한 번 안 울어요. 그렇게 순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이게 그 아이의 탓도 있지만 내가 마음을 참 잘 고쳐먹었다, 그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가 이제 자기 업이라고 하는 게 그만큼, 이 어떤 것에 딱 싫은 것에 저 사람들 싫어, 안 봐야 돼, 그러면은 안 봐지는 게 아니고 더 그런 상황들이 내 앞에 나툰다. 그게 업장에서 올라오는 거고, 그게 업력에 의해서 업보를 받게 되는 거거든요.
그래서 제가 이제 어떤 거냐면, 제가 이 안경을 벗고 있는데, 이게 변색 렌즈라고 했잖아요. 요놈이 색깔이 달라지는데, 농도가 달라지는 게 왜 어떻게 달라지냐면, 자외선 농도하고 비례해서 달라집니다. 자외선이 강하면 새까매져요. 안에 들어와서 자외선 없는데 하면 정상 안경이 되고. 그런데 그런 것처럼 내 마음도, 내 마음이라고 하는 이 생각도 그렇게 상황에 따라서 물들어 가는 거란 말이에요. 그래서 그 생각을 우리가 외경계에 따라가지고 쫓아다니다 보면 마음이 물들었다 빠졌다, 물들었다 빠졌다를 반복하는 거예요. 계속. 그래서 우리는 기도를 왜 하냐. 그거를 이겨내려고 기도하는 게 아니에요. 이건 하수 기도입니다. 하수, 하근기 기도. 여러분은 오늘 굉장히 중요한 거를 알게 될 거예요. 왜? 제가 그걸 말씀드릴 거거든요. 그게 뭐냐 하면, 궁금하죠.
기도를 하는 이유는 내 마음에, 내 마음속에 언제나 무량 생명 부처님의 공덕의 빛이 비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기도하는 겁니다. 밖에서 부처님의 가피를 받아와서 내가 어떠한 소원이나 기도나 성취되는 것이 아니고, 기도를 왜 하느냐, 내 마음에 이미 와 있는 부처님의 무량 공덕 생명을 확인하기 위해서 기도하는 거예요. 이게 출발점부터 다른 겁니다. 그동안에 기도가 성취가 잘 안 됐다, 기도만 하면 장애가 생긴다, 기도만 하면 자꾸 졸음이 온다, 이거는 밖에서 뭔가를 끄집어 오려고 하기 때문에 그 기도가 그렇게 열리는 겁니다.
그럼 기도를 할 때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내 마음에 이미 와 있는 부처님의 무량 공덕 생명을 깨워내는 게 기도예요. 그거부터 출발해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 부처님의 무량 공덕 생명이 내 마음에 와 있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내가 가지고 있는 이 현상계에 있는 장애는 이미 사라지고 없는 겁니다. 이거를 깨워내고 이거를 연결해야지만이 기도가 되는 거예요. 쉽게 말하면 내가 본래 붓다라고 하는 것을 확실히 내가 내 것으로 만드는 게 기도입니다. 기도를 하면 이 세 가지를 지금부터 말씀드린 대로 내 생명 내 안에 이미 부처님의 무량공덕 생명의 와 있다.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그거를 알아야 돼. 그걸 모르고 그렇게 해서 그 마음이 연결돼서 문이, 마음의 문이 활짝 열려야 기도가 성취되는데, 우리는 무명과 가래 때문에, 아까 말씀드렸듯이 무명과 가래 때문에, 이 마음의 문을 꽉 닫아놓고 기도를 하니까 부처님이, 이 안에 있는 부처님하고 내가 바라보는 부처님하고 이렇게 만나가지고 뭔가 이렇게 서로 간에 이게 교합이 돼야 내가 성취가 되는데, 내 마음의 문을 콕 잠가놓고, 뭘로? 가래 욕심으로. 욕심이 뭐냐 하면은 가래니까 미워하는 마음, 싫어하는 마음, 이런 걸로다가 내 마음의 문을 탁 잠가놓고 기도하니까 안 되는 거예요.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거는 우리가 이미 다 그러한 부처님의 씨앗을 가지고 있다는 거잖아요. 부처님의 씨앗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를 뭐라고 불러요? 불자(佛子)라고 부르잖아요. 불자. 불자. 불자를 어떻게 보면은 부처님의 아들, 딸, 아들인가 그렇게 번역하는 그거 틀린 번역이에요. 남자 할 때 남자의 아들입니까? 그 자자는 무음이에요. 해석하면 안 되는 거예요. 불자도 마찬가지예요. 그냥 부처님이라는 뜻입니다, 불자 그러면. 왜? 우리가 내가 이미 부처님의 무량한 공덕 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거를 그 빛을, 내 안에 가지고 있는 그 생명의 무한한 빛을 내가 깨어내는 게 다라니 기도예요. 그 다라니 기도를 하는 이유가 거기 있는 거예요. 그 빛이 깨어나야 내가 살면서 겪는 여러 가지 업으로 인한 그 업장이 녹는다 이거예요. 내가 이생에 와서 지었던 말하고 행동하고 마음먹었던 모든 업장을 녹이는 유일한 빛은 내 마음속에 있는 이 부처님의 무량 공덕 생명의 빛으로만이 그걸 녹일 수가 있다. 여러분은 엄청난 오늘 보물을 하나 안고 가는 거예요. 내 안에 그런 게 있다고. 이거는 어떠한 현상적인 재물이나 높은 지위나 학력이나 이건 아무 소용없습니다. 이것을 내가 한 번 그 빛을 쬐고 보는 순간, 너무 삶이 여유로워지고 행복하고 장애가 없고 걱정이 사라집니다. 걱정할 때 이제 근심이라는 말이 따라붙잖아요. 근심 걱정 그러는데, 근심 걱정, 근심의 근자가 걱정, 걱정 근자예요. 걱정하다, 염려하다. 근심 걱정으로 가득 내 삶이. 여러분 가만히 보세요. 내가 평소에 근심 걱정을 많이 내 생각에 채우는지, 아니면 좀 아까 말씀드렸듯이 부처님의 무량 공덕 생명을 내 안에 채우는지. ‘내가 부처님의 무량공덕 생명이 내 안에 있구나’ 이걸 생각하는지 한번 이렇게 스스로가 그거를 잘 생각해 보면은, 금방 본인의 살림살이가 나온단 말이에요. 이게 어느 게 더 낫겠습니까? 근심 걱정보다는 “아, 그래 오늘 스님 말씀하셨는데, 내 안에 부처님의 무량 공덕 생명이 환하게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이 얼마나 큰 보물을 하나 얻어가는 거예요. 부처님께서는 법화경에 이것을 말씀하시려고 일곱 가지 비유로 하신 거예요. 일곱 가지 비유. 하도 못 알아들으니까, 쉽게 말해도 못 알아들으니까 비유를 해서 이제 말씀하신 게 7가지의 비유가 있단 말이에요. 그게 법화칠유(法華七喩)라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무량한 공덕 생명을 깨우려면 첫 번째로는 그러하기 때문에 첫 번째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된다. 여러분 아침에 눈 뜰 때마다 “감사합니다, 부처님. 감사합니다, 부처님. 이렇게 오늘 하루 열게 되어 감사합니다.” 이 감사합니다를 지극하게 마음으로 늘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부처님한테 감사한 거예요. 왜? 우리한테 그런 무량한 그런 공덕 생명을 움트게 하고 숨 쉬게 하고 그 빛으로 내가 살아가는 모든 장애를 비춰서 훤히 다 열어주기 때문에 감사하지 아니할 수 없죠. 감사하죠. 땡큐 붓다. 이렇게 해야 되는 거예요. 땡큐 붓다, 고급 영어가 나왔습니다. 땡큐 붓다. 오마이 붓다라고 해야 되나요? 그럼.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두 번째로는 무량 공덕 생명을 움트게 하는, 그걸 더 찬란하게 하는 것은 첫 번째는 감사하는 마음, 두 번째로는 존중하는 마음이에요. 누구를? 나 아닌 타인을,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입니다. 존경까지 아니에요. 존중. 그 사람 얘기를 들어주고 존중하는 마음. 첫 번째로는 감사한 마음을 우리가 쉽게 내지 못합니다. 그리고 존중하는 마음은 더욱 그렇죠. 누구를 존중하기보다는 나의 말과 나의 주장을 더. 그리고 그거에 맞지 않으면 미운 마음을 내기 쉽고. 우리가 이생에 벌어진 것 중에 대부분이 누군가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이에요. 거기다 근심 걱정이 오거든요. 근데 그 근심 걱정의 안에를 이렇게 들여다보면 결국은 내 뜻대로 안 되기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내 뜻대로. 근데 세상에 내 뜻대로 되는 게 있나요? 없습니다. 존중해야 되는 거죠. 존중. 그렇기 때문에 존중해야 된다. 존중하는 생각으로 내 생각을 채워야 된다.
세 번째로는 참회하는 마음을 갖는 겁니다. 참회하는 생각. 그 참회는 내가 원래 업이 많다. 사주팔자가 안 좋다고 참회하는 게 아닙니다. 내가 원래 가지고 있던 부처님의 무량 공덕 생명을 아직 깨우지 못하고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한 것에 대한 참회예요. 그 참회는 어떤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 죄를 뉘우치기 위한 참회가 아니다. 그건 아주 1차적인 차원인 거고, 여기서 참회라고 하는 것은 늘 내가 왜 아직까지 즉 이런 법문을 들었는데도 불구하고, 내 안에 부처님 무량 공덕 생명이 있다고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거를 내가 알아차리지 못하고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한 것에 대한 참회.
이 세 가지를 내 생각으로 가득가득 채워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야지만이 나의 법생명이 성장하고, 나의 법생명으로 인해가지고 내가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가피도, 부처님을 생각하면서 하는 기도도 성취될 수가 있다라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것들을 모르고 작은 거 뭔가, 다라니 하면서도 보세요. 다라니 하면서도. 다라니를 천독을 한다 그랬나요? 단 한 독이라도 지금의 마음, 감사한 마음과 존중하는 마음과 참회하는 마음을 가지고 이 일독을 하게 되면 자기 삶이 바뀔 겁니다. 이 세 개를 다 하기 그러면 한 독할 때 그냥 부처님한테 그 무량한 공덕 생명에 대한 감사한 마음, 내 주위가 부처님의 광명으로 가득 차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일독을 하는 때의 그 마음. 그런데 우리는 이제 절집 도깨비가 돼가지고 눈을 감고 다라니를 외워요. 외우는데 잘 나옵니다. 얼마나 빨리 가는지 몰라요. 나모라 다나다라 야야 나막알약 바로기제 새바라야 모지사다바야 빠르게 해. 근데 마음은 어떤 생각 하고 있어요? 오만 근심과 걱정으로 가득. 그러니까 마음의 문을 닫아놓고 그걸 올린 거예요. 마음의 문을 닫아놓고 계속 문만 두드리는 거야. 천 번 동안. 근데 문을 스스로 잠그고 스스로 열을 내고 하니까 얼마나 애가 탑니까? 그거보다 애타는 게 없죠. 우리 꿈속에서 그런 꿈 가끔 꾸잖아요. 근데 자기 꿈이잖아. 근데 막 꿈속에서 막 몸부림을 쳐요. 근데 안 열려. 이게 얼마나 답답한 일입니까? 왜 그러느냐 하면, 내 생각의 씨앗들을 그렇게 채우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지금 여러분이 저만 바라보지 마시고 한번 이렇게 눈을 감아보세요. 이렇게 지그시 눈을 감고, 지금 한 5초 동안에 할 테니까, 인례사 스님 죽비를 한번 쳐보세요. 죽비 치면은 5초 동안에 내 주위에 부처님의 무량 공덕 생명이 가득 찬 빛이 나를 꽉 비추고 있다. 이거를 5초 동안만 한번 관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마음이 흔연해지는 게 마음이 몰랑몰랑해지죠. 그 마음을 가지고 기도를 해야 됩니다. 출발할 때, 절에 와서 진관사 마음의 정원에 와서 부처님한테 딱 삼배할 때에, 내 주위에 모든 것들이 다 부처님의 무량 공덕 생명으로 빛나고 있다 생각하고서 삼배를 해야 돼요. 그리고 여러분이 일상생활에서도 아침에 일어나서 “아, 오늘도 나의 일상에 부처님의 무량 공덕 생명이 가득 빛나고 있구나. 그래서 감사하다. 그리고 나와 함께 살아가는 모든 인연들에게 인연들을 존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내가 그러한 것들을 완전하게 채우지 못한 나의 생각, 나의 마음에 참회한다.” 이 세 가지만 잘 기억하면 여러분은 예언컨대, 제가 예언을 좋아하는데, 예언컨데 반드시 반드시 부처님이 될 거다. 언제 될지는 모르겠어요. 근데 반드시, 반드시. 근데 이렇게 얘기하니까 어떤 보살님이 저한테 와서, 저 친한 보살님이 “스님 법문은 하나 마나한 소리를 너무 많이 한다고. 스님 법문을 듣다 보면 참 마음에 와닿는데, 나중에 보면 아무것도 안 남는데.” 그래 내가 그래서 법문을 제대로 했다. 들을 때는 간절한데, 듣고 나서 되돌아서면 아무 생각이 안 나. 그게 진짜 법문이에요. 여기 앉아 계신 모든 분들이 언젠가는 다 부처님이 되는데, 그 부처님이 되는 가장 빠른 방법이 내 안에 무량 공덕 생명이 빛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겁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의 요체입니다. 그게 부처님이 뭘 깨달았어요? 내가 부처다. 지혜와 자비가 늘 살아 숨쉬는 존재다 라는 걸 당신이 우리에게 역력하게 8만 4천 법문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거잖아요.
저의 예언은 100% 맞습니다. 제가 봄에 와서 얘기했잖아요. 가을이 올 거다. 가을이 오니까 이 진관사의 도량에 오색 단풍이 들어가지고 아름답잖아요. 100%로 맞은 거 아니겠습니까? 중요한 게 더 중요한 게 뭐냐. 그 예언 중에 그때에 건강하게 우리가 다 같이 얼굴 볼 거다. 그게 핵심이에요. 앞에 거 뒤에 거 딱 잘라내고 앞에 것만 생각하면 안 돼. 우리가 그러한 존재이기 때문에 또 언제 만날지 모르겠지만, 그때 우리는 꼭 얼굴에 부처님의 무량 공덕 생명이 빛나는 그러한 불자가 돼서 만나기를 서원하면서 오늘 이야기 접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