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법문
-
[천독다라니기도] 11월 10일 천독다라니기도 회향 법문
가섭스님 2024-11-10
당신은 (부처님이십니다.) 마하반야바라밀.(마하반야바라밀) 대단히 반갑습니다. 오랜만에 뵙죠. 오랜만에 봐야 반갑죠. 그죠. 진관사 도량이 가을로 흠뻑 물들어 있어서, 차에서 내려서 이렇게 둘러보는데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참 좋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달리 표현할 말이 없더라고요, 보니까. 그런데 제가 지금 안경을 벗고 있잖아요. 그 원래 쓰는 안경이 있는데, 아침에 나오면서 그 일상에 운동할 때 끼는 안경을 끼고 와가지고, 색이 변하는 안경 있잖아요, 변색 안경, 그걸 써가지고, 너무 멋있게 보일 것 같아가지고, 안경을 벗고 해야 되겠다. 벗으니까 좋네요. 왜냐 하면은 이것도 참 좋은 게, 잘 보이지가 않네. 그냥 두려운 마음이 사라져요. 무슨 말도 다 할 것 같은데. 오늘은 이제 천수다라니를 회향하는 그런 날이기 때문에, 기도 성취를 위한 세 가지 마음에 대해서 말씀을 드릴까 합니다. 일단은 우리가 기도를 이제 하는데, 우선 기도를 하기 전에 가장 중요한 거는 <생각을 생각해 봐야 됩니다.> 생각을 생각해 봐야 돼. 생각이라는 게 있잖아요. 생각. 누구나 다 생각을 하고 살죠. 근데 요즘에는 생각 없이 사는 사람도 있어요, 또.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이런 말 하잖아요. 생각 있게 살아야 되는데, 생각을 생각하지 않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단 말이에요. 말이 좀 어렵긴 한데, 지금 여러분이 어떤 생각이 있느냐. 여러분의 마음에 생각이 올라오잖아요. 그걸 의식이라고 하잖아요. 의식. 의식은 생멸하는 거란 말이에요. 생멸. 의식은 이렇게 올라왔다가 사라지고, 또 올라왔다 사라지고 하잖아요. 한 생각이 쭉 이렇게 이어지는 사람이 있는데, 그건 죽은 사람이에요. 사는 사람은 생각이든 의식이든 올라왔다 내려갔다 하죠. 그 생각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생각을 생각하고 사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 그냥 살죠. 그래서 이제 우리가 마음 안에 의식 안에 있는 생각이라고 하는 걸 한번 생각해봐야 된다. 그 생각이라고 하는 틀 안에 무엇을 채울 것이냐. 무엇이 채워져 있느냐. 이게 기도의 핵심 포인트예요. 여러분이 지금 눈을 지그시 감고, 평소에 어떤 생각들을 하고 사는지를 이렇게 들여다보면, 그건 옛날 어른들이 뭐라고 했냐면 그걸 자기 살림살이라고 얘기했단 말이에요. 그 마음 생각으로 자기 살림살이를 누구나 다 알아요. 이거는 근데 누구한테도 말하면 안 돼. 자기만 알고 있어야 돼. 왜냐. 말해도 다 군더더기, 자기밖에 모르는 거예요. 그 생각이라고 하는 거 자체를 어떻게 보면 어떠한 것들, 생각이라는 것들을 불교에서는 생각 염자(念)라는 게 있잖아요. 생각 염자. 그 생각이라고 하는 거를 바른 생각을 해야 된다. 그러다 보니까 이제 정념(正念)이라고 표현했어요. 팔정도에서는 바른 생각, 정념. 그걸 뭐 요즘에는 <마음 챙김> 이렇게 번역하는데, 그것도 틀린 번역은 아닙니다마는, 정확한 생각은, 생각은 기억이에요. 기억. 어떤 기억을 해내느냐. 그 생각을 할 때 어떤 생각으로, 어떤 기억으로 내가, 내 생각이 채워져 있느냐라는 거예요. 보통은 과거의 경험으로 인해가지고 내가 그 생각들이 올라오잖아요. 그래서 우리 부처님께서는 그 생각을 6가지로 국한해서 우리 수행 방법을 말씀하셨단 말이에요. 그걸 육념법이라고 얘기를 합니다. 물론 이제 대승의 수행법인데, 육념법, 육념법은 이제 첫 번째는 이제 부처님이잖아요. 부처님을 생각하라 그게 뭐예요? 염불(念佛), 염법(念法), 염승(念僧), 삼귀의 불법 삼보잖아요. 그다음에 또 나오는 게 염시(念施), 염계(念戒,) 염천(念天) ,이렇게 나와요. 그러니까 염시는 뭐냐 하면, 내가 어떻게 베풀고 살 거냐를 생각하라는 거예요. 우리는 이제 그 생각 안 하고, 어떻게 많이 끌어안을 거냐, 많이 벌 거냐, 내 것을 얼마큼 많이 만들 거냐, 이 생각을 하고 살잖아요. 근데 많이 어떻게 하면 내가 베풀고 살 거냐. 그것이 내 육체를 통하든, 나의 물질을 통하든, 나의 마음을 통하든, 어떻게 베풀고 살 거냐. 그다음에 염계예요. 염계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살도음망주(殺盜婬妄酒)도 있지만, 오계 살도음망주도 있지만, 또 삼귀의계(三歸依戒)도 있죠. 이것은 내가 얼마큼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생활을 할 거냐. 쉽게 말하면 양심에 스스로 속이지 않고, 스스로 자기를 속이지 않고, 얼마큼 윤리적인 생활을 할 거냐라는 것을 생각하고 사는 거예요. 기억하고 사는 거. 그게 염계죠. 그리고 염천은 뭐냐 그러면, 하늘이라고 표현했지만, 내가 이생에 이 육신이 사대로 흩어지고 나서 그다음에 어떠한 과보를 받을 거냐. 근데 그 과보를 받는데 천이니까, 하늘이니까 좀 더 좋은 과보를, 좋은 결과물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라는 건데, 그것은 바로 얼마큼 공덕을 지고 살 거냐라는 거예요. 부처님과 부처님 가르침과 부처님 가르침을 닦고 수행하는 수행자들과 그리고 내가 어떻게 베풀고 살 거냐, 그리고 어떻게 윤리적인 생활을 할 거냐, 그리고 어떻게 공덕을 짓고 살 거냐, 이것이 이제 6가지의 수행법 중에 하나였단 말이에요. 그걸 염자를 써가지고 육념법이라고 하는데,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채울 거냐 라는 말이죠. 생각. 그런데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우리는 그걸 업이라고 부르기도 해요. 자기 업에 의해 가지고 그 생각의 틀이 구성되고, 내용물이 구성되고, 또 결과물이 구성돼서 그게 밖으로 송출돼 나오는 거잖아요. 생각이 언어나 내지는 행위로 나오는 건데, 그걸 삼업이라고 표현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업이라고 하는 거는 결과론적인 업이 아니에요. 우리가 우리 업 이렇게 얘기하면은 늘 우리가 이제 착각하는 게 뭐냐 하면 과보라고 생각한단 말이야. 과보, 업은. 근데 업은 현재 진행형이라는 거예요. 불교의 업설은 인도 당시에 있던 업설하고 다른 이유가 뭐냐 그러면, 무게 중심이 어디 있냐 그러면은, 불교의 업설은 지금 내 마음, 지금 이 순간에 무게 중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내가 업이라고 하는 게 있는데 그 업을 추동하는 업보가 있고, 그것이 내가 습관이 돼서 차 있는 그 창고를 업장이라고 하죠. 업장. 그래서 업보, 업장이 있는데, 그것을 내 안으로, 내가 살아있을 때 내 입으로, 내 언어로, 내 행위로 나오게 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그거를 업력이라 해요. 업력. 업의 동력이라는 얘기예요. 이거 이제 우리는 알게 모르게 그런 과정 속에서 살고 있단 말이에요. 근데 그 업력이 되는, 업의 동력이 되는 게 두 가지가 있는데, 그 업의 동력이 되는 것이 하나가 무명이요, 하나는 가래입니다. 가래. 무명은 뭐냐 하면 밝지 못한 거란 말이에요. 밝지 못한 거. 부처님께서 견성하시고 나서, 제일 먼저 이 연기라고 하는 거를 이렇게 순관(順觀)하시는데 그때 첫 번째가 무명을 관하시잖아요. 사람이 왜 생로병사가 있느냐. 역관을 하면은 나중에 무명이 되는 거고, 무명의 순관, 순관으로 순서대로 쭉 하다 보면은 노사까지 가는데, 그때 첫 번째가 무명이잖아요. 지혜롭지 못한 거란 말이에요. 사람이 지혜롭지 못했기 때문에 사람이 생사를 한다는 거예요. 생로병사를 한다. 근데 또 하나가 우리가 업에 빠져드는 이유가 뭐냐. 가래입니다. 가래. 가래는 뭐냐 하면, 어떤 현상들이 그게 좋은 거든 싫은 거든 간에, 거기에 딱 달라붙어가지고 떨어지지 않는, 애착하는 거예요. 애착. 집착이라 하죠. 그걸 다른 말로 이제 가래라고 그러는데 가래는 일종의 번뇌예요. 번뇌. 예를 들면 좋은 거는 계속 내가 취하려고 하는 마음이 있고, 내가 한 번 싫은 사람이 있어요. 가족 관계가 그럴 수도 있고, 이웃과 그럴 수도 있고, 친구 사이에도 그럴 수도 있고, 한 번 싫어지면은 그 사람을 잘 안 보려고 그래요. 잘 안 보려고 그래요. 근데 안 보려고 하면 안 보려고 할수록 어떻게 돼요? 더 내 눈에 나툽니다, 그 사람이. 그게 내 업이라는 거예요. 제가 이제 한 보름 전에 미국을 2주간 다녀왔는데, 저는 이제 미국을 들어가는데, 뉴욕 행사가 있어가지고 들어가는데, 종단 행사가 있었어요. 놀러 간 거 아닙니다. 물론 여행도 했어요. 했는데, 타임스퀘어 참 좋대요. 근데 그 미국을 들어가는데 내가 자리에 쭉 앉았는데, 내 뒷좌석에, 내 바로 옆에 갓난아기가 탄 거예요. 그 비행 시간이 13시간인데, 10시간을 울더라고요. 그것도 이제 좀 장시간이니까, 이제 편하게 간다고 앞에를 탔는데, 앞에가 어딘지 아시죠? 몇 명 못 앉는데. 거기 탔는데 옆에 앉아가지고 10시간을 울어 재끼는데, 나중에 내가 “아, 업보구나.” ‘혼자 평생 편하게 살았으니까 아기를 키우는 게 얼마나 힘든지 한번 경험해 봐라.’ 근데 그 아이가 참 희한하게, 원래 그런가요? 안으면 안 우는데, 놓으면 울더만요. 그래요? 저는 어릴 때 제 큰누이 얘기 들으면, 안아도 안 울고, 놔도 안 울고 했다는데. 10시간 우는데, 내가 마음으로 그때, 이제 처음에는 이렇게 우니까 한두 시간은 그냥 그럴 수 있겠구나. 3시간이 지나니까 단전에서부터 뭔가 쫙 올라와요. 단전에서부터. 그러고 굉장히 예민해져요. 모든 숨구멍이 그 아이의 울음소리로 차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리고 5시간이 딱 지나니까 단전에서 장까지 올라와가지고 장이 뒤집혀요. 밥맛도 없고. 왜냐하면 조용히 살던 사람이. 근데 그 아기가 그냥 우는 게 아니고, 뭐라 할까나 정말로 세게 우는 거 있잖아요. 근데 엄마가 그 누군지, 엄마가 그 아이를 방치해요. 우는데. 아빠가 안아. 엄마, 이러면 또 옆으로 새는데, 어쨌든. 그래서 이제 나중에 한 7, 8시간 지나니까 머리 끝에서 이렇게 뿅 나가더라고요. 뭐가. 그래서 내가 그 순간에 이거 놔야 되겠구나, 이 생각을. 그러면서 이제 마음속으로 마아반야바라밀 마아반야바라밀 마아반야바라밀. 그래서 이제 정근을 하고 있으니까, 애가 울음을 그친 건 아닌데 그다음부터는 내 마음이 요동을 안 치는 거예요. 요동을. 그래서 내가 이게 이것도 하나의 내 마음 수련 과정이구나. 그러고 이제 일정을 마치고 귀국하는데, 똑같이 내가 팔 번이었는데, 육 번에 애가 또 탄 거예요. 근데 그 아이는 단 한 번 안 울어요. 그렇게 순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이게 그 아이의 탓도 있지만 내가 마음을 참 잘 고쳐먹었다, 그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가 이제 자기 업이라고 하는 게 그만큼, 이 어떤 것에 딱 싫은 것에 저 사람들 싫어, 안 봐야 돼, 그러면은 안 봐지는 게 아니고 더 그런 상황들이 내 앞에 나툰다. 그게 업장에서 올라오는 거고, 그게 업력에 의해서 업보를 받게 되는 거거든요. 그래서 제가 이제 어떤 거냐면, 제가 이 안경을 벗고 있는데, 이게 변색 렌즈라고 했잖아요. 요놈이 색깔이 달라지는데, 농도가 달라지는 게 왜 어떻게 달라지냐면, 자외선 농도하고 비례해서 달라집니다. 자외선이 강하면 새까매져요. 안에 들어와서 자외선 없는데 하면 정상 안경이 되고. 그런데 그런 것처럼 내 마음도, 내 마음이라고 하는 이 생각도 그렇게 상황에 따라서 물들어 가는 거란 말이에요. 그래서 그 생각을 우리가 외경계에 따라가지고 쫓아다니다 보면 마음이 물들었다 빠졌다, 물들었다 빠졌다를 반복하는 거예요. 계속. 그래서 우리는 기도를 왜 하냐. 그거를 이겨내려고 기도하는 게 아니에요. 이건 하수 기도입니다. 하수, 하근기 기도. 여러분은 오늘 굉장히 중요한 거를 알게 될 거예요. 왜? 제가 그걸 말씀드릴 거거든요. 그게 뭐냐 하면, 궁금하죠. 기도를 하는 이유는 내 마음에, 내 마음속에 언제나 무량 생명 부처님의 공덕의 빛이 비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기도하는 겁니다. 밖에서 부처님의 가피를 받아와서 내가 어떠한 소원이나 기도나 성취되는 것이 아니고, 기도를 왜 하느냐, 내 마음에 이미 와 있는 부처님의 무량 공덕 생명을 확인하기 위해서 기도하는 거예요. 이게 출발점부터 다른 겁니다. 그동안에 기도가 성취가 잘 안 됐다, 기도만 하면 장애가 생긴다, 기도만 하면 자꾸 졸음이 온다, 이거는 밖에서 뭔가를 끄집어 오려고 하기 때문에 그 기도가 그렇게 열리는 겁니다. 그럼 기도를 할 때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내 마음에 이미 와 있는 부처님의 무량 공덕 생명을 깨워내는 게 기도예요. 그거부터 출발해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 부처님의 무량 공덕 생명이 내 마음에 와 있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내가 가지고 있는 이 현상계에 있는 장애는 이미 사라지고 없는 겁니다. 이거를 깨워내고 이거를 연결해야지만이 기도가 되는 거예요. 쉽게 말하면 내가 본래 붓다라고 하는 것을 확실히 내가 내 것으로 만드는 게 기도입니다. 기도를 하면 이 세 가지를 지금부터 말씀드린 대로 내 생명 내 안에 이미 부처님의 무량공덕 생명의 와 있다.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그거를 알아야 돼. 그걸 모르고 그렇게 해서 그 마음이 연결돼서 문이, 마음의 문이 활짝 열려야 기도가 성취되는데, 우리는 무명과 가래 때문에, 아까 말씀드렸듯이 무명과 가래 때문에, 이 마음의 문을 꽉 닫아놓고 기도를 하니까 부처님이, 이 안에 있는 부처님하고 내가 바라보는 부처님하고 이렇게 만나가지고 뭔가 이렇게 서로 간에 이게 교합이 돼야 내가 성취가 되는데, 내 마음의 문을 콕 잠가놓고, 뭘로? 가래 욕심으로. 욕심이 뭐냐 하면은 가래니까 미워하는 마음, 싫어하는 마음, 이런 걸로다가 내 마음의 문을 탁 잠가놓고 기도하니까 안 되는 거예요.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거는 우리가 이미 다 그러한 부처님의 씨앗을 가지고 있다는 거잖아요. 부처님의 씨앗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를 뭐라고 불러요? 불자(佛子)라고 부르잖아요. 불자. 불자. 불자를 어떻게 보면은 부처님의 아들, 딸, 아들인가 그렇게 번역하는 그거 틀린 번역이에요. 남자 할 때 남자의 아들입니까? 그 자자는 무음이에요. 해석하면 안 되는 거예요. 불자도 마찬가지예요. 그냥 부처님이라는 뜻입니다, 불자 그러면. 왜? 우리가 내가 이미 부처님의 무량한 공덕 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거를 그 빛을, 내 안에 가지고 있는 그 생명의 무한한 빛을 내가 깨어내는 게 다라니 기도예요. 그 다라니 기도를 하는 이유가 거기 있는 거예요. 그 빛이 깨어나야 내가 살면서 겪는 여러 가지 업으로 인한 그 업장이 녹는다 이거예요. 내가 이생에 와서 지었던 말하고 행동하고 마음먹었던 모든 업장을 녹이는 유일한 빛은 내 마음속에 있는 이 부처님의 무량 공덕 생명의 빛으로만이 그걸 녹일 수가 있다. 여러분은 엄청난 오늘 보물을 하나 안고 가는 거예요. 내 안에 그런 게 있다고. 이거는 어떠한 현상적인 재물이나 높은 지위나 학력이나 이건 아무 소용없습니다. 이것을 내가 한 번 그 빛을 쬐고 보는 순간, 너무 삶이 여유로워지고 행복하고 장애가 없고 걱정이 사라집니다. 걱정할 때 이제 근심이라는 말이 따라붙잖아요. 근심 걱정 그러는데, 근심 걱정, 근심의 근자가 걱정, 걱정 근자예요. 걱정하다, 염려하다. 근심 걱정으로 가득 내 삶이. 여러분 가만히 보세요. 내가 평소에 근심 걱정을 많이 내 생각에 채우는지, 아니면 좀 아까 말씀드렸듯이 부처님의 무량 공덕 생명을 내 안에 채우는지. ‘내가 부처님의 무량공덕 생명이 내 안에 있구나’ 이걸 생각하는지 한번 이렇게 스스로가 그거를 잘 생각해 보면은, 금방 본인의 살림살이가 나온단 말이에요. 이게 어느 게 더 낫겠습니까? 근심 걱정보다는 “아, 그래 오늘 스님 말씀하셨는데, 내 안에 부처님의 무량 공덕 생명이 환하게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이 얼마나 큰 보물을 하나 얻어가는 거예요. 부처님께서는 법화경에 이것을 말씀하시려고 일곱 가지 비유로 하신 거예요. 일곱 가지 비유. 하도 못 알아들으니까, 쉽게 말해도 못 알아들으니까 비유를 해서 이제 말씀하신 게 7가지의 비유가 있단 말이에요. 그게 법화칠유(法華七喩)라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무량한 공덕 생명을 깨우려면 첫 번째로는 그러하기 때문에 첫 번째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된다. 여러분 아침에 눈 뜰 때마다 “감사합니다, 부처님. 감사합니다, 부처님. 이렇게 오늘 하루 열게 되어 감사합니다.” 이 감사합니다를 지극하게 마음으로 늘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부처님한테 감사한 거예요. 왜? 우리한테 그런 무량한 그런 공덕 생명을 움트게 하고 숨 쉬게 하고 그 빛으로 내가 살아가는 모든 장애를 비춰서 훤히 다 열어주기 때문에 감사하지 아니할 수 없죠. 감사하죠. 땡큐 붓다. 이렇게 해야 되는 거예요. 땡큐 붓다, 고급 영어가 나왔습니다. 땡큐 붓다. 오마이 붓다라고 해야 되나요? 그럼.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두 번째로는 무량 공덕 생명을 움트게 하는, 그걸 더 찬란하게 하는 것은 첫 번째는 감사하는 마음, 두 번째로는 존중하는 마음이에요. 누구를? 나 아닌 타인을,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입니다. 존경까지 아니에요. 존중. 그 사람 얘기를 들어주고 존중하는 마음. 첫 번째로는 감사한 마음을 우리가 쉽게 내지 못합니다. 그리고 존중하는 마음은 더욱 그렇죠. 누구를 존중하기보다는 나의 말과 나의 주장을 더. 그리고 그거에 맞지 않으면 미운 마음을 내기 쉽고. 우리가 이생에 벌어진 것 중에 대부분이 누군가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이에요. 거기다 근심 걱정이 오거든요. 근데 그 근심 걱정의 안에를 이렇게 들여다보면 결국은 내 뜻대로 안 되기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내 뜻대로. 근데 세상에 내 뜻대로 되는 게 있나요? 없습니다. 존중해야 되는 거죠. 존중. 그렇기 때문에 존중해야 된다. 존중하는 생각으로 내 생각을 채워야 된다. 세 번째로는 참회하는 마음을 갖는 겁니다. 참회하는 생각. 그 참회는 내가 원래 업이 많다. 사주팔자가 안 좋다고 참회하는 게 아닙니다. 내가 원래 가지고 있던 부처님의 무량 공덕 생명을 아직 깨우지 못하고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한 것에 대한 참회예요. 그 참회는 어떤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 죄를 뉘우치기 위한 참회가 아니다. 그건 아주 1차적인 차원인 거고, 여기서 참회라고 하는 것은 늘 내가 왜 아직까지 즉 이런 법문을 들었는데도 불구하고, 내 안에 부처님 무량 공덕 생명이 있다고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거를 내가 알아차리지 못하고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한 것에 대한 참회. 이 세 가지를 내 생각으로 가득가득 채워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야지만이 나의 법생명이 성장하고, 나의 법생명으로 인해가지고 내가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가피도, 부처님을 생각하면서 하는 기도도 성취될 수가 있다라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것들을 모르고 작은 거 뭔가, 다라니 하면서도 보세요. 다라니 하면서도. 다라니를 천독을 한다 그랬나요? 단 한 독이라도 지금의 마음, 감사한 마음과 존중하는 마음과 참회하는 마음을 가지고 이 일독을 하게 되면 자기 삶이 바뀔 겁니다. 이 세 개를 다 하기 그러면 한 독할 때 그냥 부처님한테 그 무량한 공덕 생명에 대한 감사한 마음, 내 주위가 부처님의 광명으로 가득 차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일독을 하는 때의 그 마음. 그런데 우리는 이제 절집 도깨비가 돼가지고 눈을 감고 다라니를 외워요. 외우는데 잘 나옵니다. 얼마나 빨리 가는지 몰라요. 나모라 다나다라 야야 나막알약 바로기제 새바라야 모지사다바야 빠르게 해. 근데 마음은 어떤 생각 하고 있어요? 오만 근심과 걱정으로 가득. 그러니까 마음의 문을 닫아놓고 그걸 올린 거예요. 마음의 문을 닫아놓고 계속 문만 두드리는 거야. 천 번 동안. 근데 문을 스스로 잠그고 스스로 열을 내고 하니까 얼마나 애가 탑니까? 그거보다 애타는 게 없죠. 우리 꿈속에서 그런 꿈 가끔 꾸잖아요. 근데 자기 꿈이잖아. 근데 막 꿈속에서 막 몸부림을 쳐요. 근데 안 열려. 이게 얼마나 답답한 일입니까? 왜 그러느냐 하면, 내 생각의 씨앗들을 그렇게 채우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지금 여러분이 저만 바라보지 마시고 한번 이렇게 눈을 감아보세요. 이렇게 지그시 눈을 감고, 지금 한 5초 동안에 할 테니까, 인례사 스님 죽비를 한번 쳐보세요. 죽비 치면은 5초 동안에 내 주위에 부처님의 무량 공덕 생명이 가득 찬 빛이 나를 꽉 비추고 있다. 이거를 5초 동안만 한번 관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마음이 흔연해지는 게 마음이 몰랑몰랑해지죠. 그 마음을 가지고 기도를 해야 됩니다. 출발할 때, 절에 와서 진관사 마음의 정원에 와서 부처님한테 딱 삼배할 때에, 내 주위에 모든 것들이 다 부처님의 무량 공덕 생명으로 빛나고 있다 생각하고서 삼배를 해야 돼요. 그리고 여러분이 일상생활에서도 아침에 일어나서 “아, 오늘도 나의 일상에 부처님의 무량 공덕 생명이 가득 빛나고 있구나. 그래서 감사하다. 그리고 나와 함께 살아가는 모든 인연들에게 인연들을 존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내가 그러한 것들을 완전하게 채우지 못한 나의 생각, 나의 마음에 참회한다.” 이 세 가지만 잘 기억하면 여러분은 예언컨대, 제가 예언을 좋아하는데, 예언컨데 반드시 반드시 부처님이 될 거다. 언제 될지는 모르겠어요. 근데 반드시, 반드시. 근데 이렇게 얘기하니까 어떤 보살님이 저한테 와서, 저 친한 보살님이 “스님 법문은 하나 마나한 소리를 너무 많이 한다고. 스님 법문을 듣다 보면 참 마음에 와닿는데, 나중에 보면 아무것도 안 남는데.” 그래 내가 그래서 법문을 제대로 했다. 들을 때는 간절한데, 듣고 나서 되돌아서면 아무 생각이 안 나. 그게 진짜 법문이에요. 여기 앉아 계신 모든 분들이 언젠가는 다 부처님이 되는데, 그 부처님이 되는 가장 빠른 방법이 내 안에 무량 공덕 생명이 빛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겁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의 요체입니다. 그게 부처님이 뭘 깨달았어요? 내가 부처다. 지혜와 자비가 늘 살아 숨쉬는 존재다 라는 걸 당신이 우리에게 역력하게 8만 4천 법문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거잖아요. 저의 예언은 100% 맞습니다. 제가 봄에 와서 얘기했잖아요. 가을이 올 거다. 가을이 오니까 이 진관사의 도량에 오색 단풍이 들어가지고 아름답잖아요. 100%로 맞은 거 아니겠습니까? 중요한 게 더 중요한 게 뭐냐. 그 예언 중에 그때에 건강하게 우리가 다 같이 얼굴 볼 거다. 그게 핵심이에요. 앞에 거 뒤에 거 딱 잘라내고 앞에 것만 생각하면 안 돼. 우리가 그러한 존재이기 때문에 또 언제 만날지 모르겠지만, 그때 우리는 꼭 얼굴에 부처님의 무량 공덕 생명이 빛나는 그러한 불자가 돼서 만나기를 서원하면서 오늘 이야기 접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신중기도] 11월 1일 음력 10월 신중기도 입재 법문
종범스님 2024-11-01
義相祖師法性偈이야기⑦(의상조사법성게이야기)--不守自性隨緣成, 指緣起體 --(불수자성수연성, 지연기체) 안녕하십니까? 갑진년 10월 초하루 진관사 법문입니다. 오늘 법문은 의상조사 법성게 중에서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 불수자성수연성, 그 게송입니다. 전번처럼 손뼉을 한 번 딱 치고 10번을 외워요. 같이 시작. (짝) 불수자성수연성 불수자성수연성 불수자성수연성 불수자성수연성 불수자성수연성 불수자성수연성 불수자성수연성 불수자성수연성불수자성수연성 불수자성수연성 (짝) 불수자성수연성이라. 뭐가 그러냐. 우주의 본성이 법성이고, 중생의 본성이 진성인데, 이 법성, 진성은 불변이에요. 변하지 않아요. 허공이 변하지 않듯이. 법성, 진성은 불변 진성이다. 변하지 않는데 그 변하지 않는 모습을 지키질 않아요. 자성을 안 지켜. 그럼 어찌 되냐. 수연성이에요. 인연 따라서 이루어져요. 그래서 이걸 변하지 않으면서 인연 따라 이루어진다. 변하지 않으면서 인연 따라 이루어진다. 이걸 불수자성수연성인데, 줄여서 말하면 불변수연이다. 변하지 아니하면서 인연을 따른다, 이래요. 그래서 이것이 이 법계 인연, 온 우주 만상의 인연의 근본 본체다 이래서, 연기체라고 설명을 하거든요. 이게 도대체 뭐 하는 소린가. 일체 중생의 근본 자성을 가리키는 거예요. 중생의 자체 성질. 그걸 자성이라 그러는데, 나의 자성, 나의 자체 성질. 성질이라 그러면 성격 고약한 성질머리가 아니고요. 본성, 본질. 나의 본성, 본질은 뭐냐. 그것은 우주의 근원을 이루고 있는 법성이고, 나의 근원을 이루고 있는 진성이다. 그거는 불변이다. 그런데 그 불변의 진성이 자성을 지키지 않고 인연을 따라서 이루어진다. 사람도 되고 또 온갖 것이 다 된다 이거에요. 그런데 그 진성은 불변이다. 그런데 그 불변의 진성이 인연 따라서 다 이루어진다. 이것이 불변수연의 자기 자성이에요. 나의 자성은 불변수연이다. 수연은 뭐냐? 어머니 태중에 있을 때는 태아고, 태어나면 영아고, 그다음에는 소년이고, 청년이고, 노년이고, 사라지고, 또 태어나고, 보이고, 안 보이고 이게 다 인연을 따르는 건데, 여기에는 불변의 진성이 있다, 이거예요. 그래서 이 지혜의 삼매를 딱 닦으면 그 불변 진성을 보는데, 그걸 견성이라 그래요. 불변 진성을 본다고. 근데 이 견성은 눈으로는 안 돼요. 지혜로만 돼요. 왜 눈으로 안 되냐. 이 중생의 눈이라고 하는 것은 눈 자체가 보는 게 아니에요. 그럼 뭘 보냐? 배운 대로 봐요. 그래서 어릴 때는 열심히 배워야 돼요. 걔들이 다 살려고 그러는 거예요. 이거 뭐야? 이거 뭐야? 이거 뭐야? 이거 뭐야? 그 배우지 않은 거는 봐도 몰라요. 그래서 걔들이 평생 살 준비를 어릴 때 다 하는 거예요. 이거 뭐야? 이거 뭐야? 이거 뭐야? 배울 거 다 배웠으면 이제 엄마가 필요 없어요. 그때 이제 엄마로부터 독립하는 거예요. 엄마 말 안 들을 때 그때는 이제 평생 살 것 다 봤다. 이거 본능적으로 아는 거예요. 그다음에는 안 배워요. 그다음에 활동하기 시작하는데 그때는 이제 친구를 찾아서 자기 좋은 걸 찾아서 가요. 자기 좋은 거는 까까인데, 엄마는 필요 없고, 이제 까까. 저거 까까, 이거 까까. 이렇게 처음에는 엄마, 그다음에 까까. 그다음에 내 좋은 거, 이렇게 변해요, 자꾸. 이게 수연성이에요. 그런데 그 뭔지는 몰라도 그 보는 힘이 있는데 그게 진성이에요. 이거, 이거 뭔지 모르지만 이걸 보잖아요. 그건 알기 전에 진성이 나타난 거예요. 이렇게 하면 처음에는 모르죠. 저건 뭐야? 손이야. 그러면 엄마한테 배우잖아요. 그러면 손이라는 말을 듣기 전에 이렇게 나타난 걸 눈으로 봐요. 그런데 뭔지는 몰라. 근데 손이라고 배운 거예요. 귀도 마찬가지예요. 뭐 들으면 배운 대로 듣지, 그냥 듣기만 하지 뭔지 몰라요. 그래서 이 성이라는 거는 배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배우기 전부터 있던 거라, 그 성을 보려면 지금까지 사람이다. 뭐 태어난다, 죽는다, 이런 배우는 생각을 가지고는 모르고, 배우기 전부터 아는 그 지혜로 돌아가야 알아요. 그게 견성이에요. 근데 사람들은 눈으로 보려고 그래요. 지금 당장. 귀로 들으려고 그래요. 그걸 하려면 할수록 더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배운 거, 익힌 거, 딱 가라앉혀서, 배우기 전으로 돌아가고 익히기 전으로 딱 돌아가면 한없이 한없이 인연 따라 이루어지지만, 언제나 언제나 변함이 없는 진성이 나타나는데, 다른 걸로 보는 게 아니에요. 역시 눈으로 봐요. 그 눈이 배운 걸 보는 게 아니라 배우기 전의 걸 본다. 그러면 배워서 보는 걸 모양이라고 하는데, 상이라고. 배우기 전을 뭐라고 그러냐. 이 모양을 이루고 있는 본질, 본래 성질, 그런데 이걸 어려운 말로 모양을 물상이라고 하고요. 물건의 모양. 물상. 이 물건의 본질을 물골이라 그래요. 물건의 뼈. 이걸 딱 보면 이제 익힌 눈으로 보면 물건인데, 지혜 눈으로 보면 물건의 뼈예요. 뼈. 그 뼈는 불변이다. 이 물건의 모양은 수연이다. 이렇게 돼서 이걸 왜 가르치느냐. 이 몸은 아무리 인연 따라 변한다 해도 그 진성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변하는 것에 집착하지 말고 변하는 것에 근심하지 말아라 이거예요. 너의 진성은 불변이다. 너의 진성은 불변이다. 그런데 다만 변하는 것에만 익힌 대로 보고, 배운 대로 듣기 때문에, 그 진성을 모르고, 배우고 익힌 것에 헤매고 있다. 뭔 소린지, 진짜 참. 진짜 심오하고, 진짜 알기 어렵고, 진짜 짜증 나요, 짜증 나. 그거 좀 쉽게 좀 가르쳐주면 얼마나 좋아. 근데 쉽게 가르쳐주면 어떻게 되냐. 배운 대로 가르치는 거예요. 배운 대로. 그래서 사람들은 재미있다고 하는데 재미가 뭐냐 그러면은, 아는 걸 듣는 걸 재미있다고 그래요. 특히 저만 아는 걸 들려줄 때 되게 재미있어요. 저만 아는 거. 근데 모르는 걸 얘기하면 재미없다 그러고, 어렵다 그래요. 그러니까 이거 진성은 한 번도 본 일도 없고, 익힌 일도 없는데, 이걸 말하니까, 얼마나 어려워요. 그러니까 불교는 인과인데, 항상 불교는 아무리 많은 얘기를 해도 원인과 결과가 그거예요.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결과 없는 원인은 없다. 그러니까 여기서 가르치는 게 결과는 생각하지 말고 원인만 갖춰라 이거예요. 염불만 하면 극락세계 가는 결과는 저절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중생들은 염불은 안 하고 극락만 가려고 한다. 이걸 하지 말라는 거예요. 원인을 중요시하지 결과만 바라지 말아라, 이거예요. 그런데 인과가 세 가지를 가르쳐요. 육도윤회 인과라고, 지옥 아귀 축생서부터 천상까지 육도윤회 인과인데, 이거는 고락인 거예요. 고통과 즐거움, 고생 끝에 낙이 온다 뭐 이런 말을 하던데, 고락, 괴로움이 있고 즐거움이 있고. 이게 이제 육도인과거든요. 지옥에 떨어지면 괴롭고, 천당에 올라가면 즐겁고. 그러면 천당에서 천당에 올라가기 전에 공덕을 다 소모하면 다시 지옥으로 떨어지고 이게 윤회거든요. 이걸 고락인과라고 그래요. 그런데 그중에서 이 복을 받던 고통을 받던 이 고락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해탈을 하고 싶다. 그러면 이제 해탈을 하려고 도를 닦아요. 사성제를 닦으면 성문이고 12연기를 닦으면 연각이고, 육바라밀을 닦으면 보살이고, 이거는 생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복을 받고 또 고통을 받고 그게 아니라, 생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도를 닦는 것을 해탈 인과라고 그래요, 해탈 생사에서 해탈하기 위한 인과다. 근데 이제 화엄경에 오면 법계인과를 가르치는데, 법계인과라고 하는 것은 평등인과인데 평등해요. 또 원융인과예요. 개별 인과가 아니라, 원융인과, 평등인과인데, 원융인과라는 건 뭐냐. 하나가 있기 위해서는 모든 것이 다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고정불변은 하나가 없기 때문에. 하나 속에는 모든 것이 다 들어오고, 하나에는 모든 것이 다 들어온다. 또 하나는 모든 것으로 다 들어간다. 이게 철학에서도 맨날 이게 어려운 문제인데, 모든 것은 하나로 들어온다. 하나는 모든 것으로 들어간다. 이걸 원융인과라 그래요. 하나와 모든 것은 원융하다. 원융이라고 하는 건 다 통한다 이 말이거든요. 하나는 고정불변은 하나가 아니라, 모든 것이 들어와서 하나가 된다는 거예요. 고정불변은 하나는 없다. 또 이 하나는 고정불변은 하나가 아니라 모든 것으로 다 들어간다. 이걸 법성게에서는 일중일체다중일 일즉일체다즉일(一中一切多中一 一卽一切多卽一 ) 이게 원융이에요. 아침부터 이런 얘기하려니까 좀 이상하네. 다 아는 얘기, 재미있는 얘기하고 가면 참 편할 텐데. 그래서 이 개별과 원융이라는 게 있는데, 이 원융을 알기가 어려운데, 이 원융만 알면 화엄을 알아요. 화엄은 원융이에요. 그리고 이 법계인과는 평등 인과라 그래요. 인이 먼저 있고 과가 뒤에 있는 게 아니라, 인과 과가 평등하다. 평등인과, 원융인과. 그러면 이 원융인과라고 하는 건 뭐냐. 하나에는 하나가 없어요. 하나에는 하나의 자성이 없다. 그럼 어째서 하나가 있냐. 인연으로 하나가 된 거예요. 여기 물건이 딱 있는데, 물건이 하나만 있을 때는 그냥 물건이에요. 그럼 여기 둘이 있을 때는 이거를 세기 위해서, 이거 하나를 짚는 거예요. 이 숫자는 자체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뭔가 셀 대상이 있을 때 숫자가 필요해요. 그러면 그냥 보면 그냥 하는 거예요. 하는데 이 하나가 없어요. 하나가. 왜 없냐. 자세히 보면 이건(컵) 흙이에요. 또 이거 물감이에요. 그리고 이걸 설계한 설계자가 있어요. 이걸 만드는 시공자가 있어요. 그래서 이 재료와 설계와 시공 빼놓으면 이거 없는 거예요. 이게 다 이렇다는 거예요. 이걸 법계 인과라고 그래요. 법계가 만나서 평등하게 이루어진다. 법계인과가 그런 거예요. 그러면 법계인과는 이게 있는 동시에 이게 원인도 되고 결과가 된다. 인과 동시다. 인과 선후가 아니다. 그러니까 한 걸음 한 걸음 가서 1km를 갔다 하면 첫 발짝 띤 때서부터 이미 간 거다. 왜냐하면 첫 발짝을 안 뗐으면 목적지에 못 가니까. 초발심(初發心)이 변성정각(便成正覺)이라고 처음 발심할 때가 성불한 거라고 한 게 평등 인과 때문에 그래요. 시작과 끝이 평등하다. 시작 없는 끝도 없고 끝없는 시작이 없다. 근데 한 걸음 딱 띠고 목적지에 도달했다 이러면 모르잖아요. 근데 사실은 한 걸음 한 걸음이 다 목적지에 도달한 거지, 마지막 한 걸음만 목적지에 도달할 수는 없다. 그래서 하나가 모든 것이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오늘 내가 기도를 했다 그러면 이미 이룬 거예요. 그게 인과 동시고 인과 평등이에요. 왜냐하면 오늘 한 그게 모여서 모여서 마지막을 이루는데, 그게 필경 성취인데, 마지막에 이룬 성취인데, 이 필경 성취는 출발과 낱낱 행위 모여서 하나하나가 그때 이미 이루어진 거다. 출발할 때 이미 마지막이 들어있고, 하나하나 중간중간에 이미 마지막이 들어있다. 이래서 일중일체다중일이다. 많은 것은 하나 속에 있다. 이걸 가르치는 게 이게 화엄의 법계인과거든요. 그러니까 하나가 모든 것이고 모든 것이 하나다 그러면 우리 몸은 하나거든요. 근데 이게 법계인 거예요. 온 우주법계인 거예요. 우리 몸이 또 우주법계는 난 거예요. 근데 이것은 수연성에서 보이기도 하고 안 보이기도 하고, 작기도 하고 크기도 하고, 젊기도 하고 늙기도 해가지고, 불수자성수연성이에요. 자성을 안 지키고 인연 따라 이루어져요. 그러니까 태어나기 전도 나고, 법계니까, 태어나기 전도 법계 나고, 자신이고, 태어나서도 법계 나고, 젊어서도 법계의 나고, 늙어서도 법계의 나고, 죽어서도 법계의 나고, 나나 안 나나, 젊으나 늙으나, 법계 자신이 나니까, 다중의 일이니까, 많은 것 속에 하나니까, 근심 걱정할 일은 하나도 없는 거예요. 근데 왜 근심 걱정을 하느냐. 내가 바로 법계인 것을 일즉다, 하나가 많은 것임을 몰라서 그래요. 몰라서. 그걸 모르는 걸 미했다고 하거든요. 미해도 보통 미한 게 아니라 아주 꽉 미했다 이래요. 자신이 법계라. 나나 안 나나, 죽으나 사나 모두 법계이기 때문에 근심 걱정은 할 일이 없는데, 법계를 내 몸으로 집착한다. 이건 법계지, 내 몸이 아니여. 인연 따라 이루어진 법계단 말이예요. 근데 법계를 모르고 내 몸으로 집착을 하니까, 그 내 몸 집착에 의해서 근심 걱정이 생기는 거예요. 이거 늙었어 그래. 법계 현상. 죽었어, 법계 현상. 태어났어, 법계 현상.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이걸 내 몸이다 하면 아이 내 몸이 늙으면 안 되잖아요. 근데 이거는 가르침이고, 실제 늙어보면 신경질은 나요. 왜 신경질은 나느냐. 뻔히 보이는데 마음대로 안 돼요. 뻔히 보이는데. 뭘 지나가다가 그냥 곧바로 씩씩하게 못 지나가고, 뭐 발로 물건을 툭툭 차더라고. 그리고 금방 한 것도 잊어버려요. 그러니까 신경질 나는데 그게 법계 현상인 거예요. 내 몸으로 집착하고 절망하고, 내 몸으로 집착하고 괴로워하고. 그거는 미혹한 작용이에요. 미혹작용이라는 게 뭐냐. 컴컴할 때 어디를 지나가는데 귀신이 딱 나타났어요. 그게 얼마나 무서운지 몰라요. 그래서 막 도망가다가 어두울 때 도망가니까 막 넘어지고 막 넘어지니까 다치고. 다치니까 아프고 이러잖아요. 근데 그 이튿날 귀신 본 데를 가만히 가서 보니까, 오래된 나무둥치였다고. 그게. 나무 둥치. 그 나무 둥치를 나무둥치로 봤으면 놀라지 않았을 거고, 안 놀라면 안 도망갔을 거고, 안 도망가면 안 넘어졌죠. 근데 이제 문제는 나무 둥치를 귀신으로 보는 순간, 그 귀신으로 봤기 때문에 두려움이 생긴 거예요. 그래서 이 몸은 법계인데, 법계는 나무 둥치단 말이에요. 근데 이걸 내 몸으로 봤다. 이건 귀신으로 잘못 본 거예요. 그러니까 이 몸 하나 때문에 온갖 근심 걱정이 다 생겨요. 얼마 아니면 이 법계 현상이 사라질 건데, 그냥 그 좋게 보이려고 온갖 짓 다 하고, 참 신비해요. 신비. 옛날에는 젊은 사람 머리가 검고, 노인들은 머리가 희었는데, 요새 노인도 머리 흰 노인 별로 없어요. 다 새카맣게 해요. 새카맣게 관리하려면 얼마나 힘들겠어요. 그리고 또 젊은 사람도 머리가 허옇게 하고 다녀요. 하얀 염색을 해가지고. 그러니까 그거 하려면 얼마나 힘들겠냐고. 근데 아무리 그래 해봐야 이 법계 현상은 불수자성이라, 자성을 안 지키고 사라져요. 사라진다고. 起而不起 法界緣起 不起而起 法性性起 기이불기 법계연기 불기이기 법성성기法界緣起 起起無起 法性性起 起起法性법계연기 기기무기 법성성기 기기법성 불수자성수연성 진성심심극미묘(眞性甚深極微妙). 극미묘라는 거는 어디에 처해도 변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불변이라는 거예요. 근데 이거를 이제 화엄학에서 어떻게 정리를 하느냐. 법계 연기, 법성성기 둘로 정리를 하거든요. 온갖 모양이 이게 법계 현상이다. 법계 연기라고 하는 건 뭐냐. 하나하나가 인연 따라 다 이루어진 거지, 독자적으로 이루어진 건 없다. 그 인연으로 이루어진 걸 연기라고 그래요. 인연 연자, 일어날 기자. 연기. 그러면 이 몸은 법계 인연으로 이루어졌다 이거예요. 이걸 그 법계 연기라고 그래요. 법계 연기. 법계 연기는 어떻게 됐냐. 기이불기(起而不起)라. 일어났지만 일어난 게 없다. 이게 핵심이에요. 법계의 모든 인연으로 이루어진 법계 연기는, 일어났지만 일어난 게 없다. 기이불기다. 일어났을 때 일어난 게 아니다. 그럼 뭔 얘기냐. 다시 이걸로 돌아가서 얘기를 해보죠. 이게 일어났어요. 이게 법계연기인 거예요. 일어났는데 이거에 자성이 없어요. 흙뿐이에요. 그릇이 있는 게 아니에요. 그리고 이 설계자 설계한 내용뿐이에요. 그릇이 본래부터 있는 게 아니에요. 그리고 여기 재료, 물감, 이걸 만든 사람 솜씨 요것뿐이지 이것 하나하나 걷어내면 이것 자체가 없어요. 그래서 법계 연기는 기이불기다. 법계의 인연으로 일어난 것은 기이, 일어날 기자 말 이을 이자, 일어났으되 일어난 게 없다. 우리 몸이 그렇다는 거예요. 우리 몸이 태어났는데 이걸 가만히 보니까 물하고 흙하고 불하고 바람하고 재료는 그런 거고, 만들기는 어머니 아버지가 만들었고 그렇잖아요. 그래가지고 태어났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지수화풍과 부모가 없으면 못 태어나요. 그런데 태어났어도 여기서 흙의 부분 뼈처럼 딴딴한 거 또 혈액, 물 부분, 체온 부분, 불, 숨쉬는 거, 바람 부분, 빼버리고, 어머니의 인연, 아버지의 인연 빼버리면 자체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법계연기는 기이불기다. 일어났지만 일어난 게 없다. 그렇게 보는 거예요. 그래서 이걸 색즉시공이라고 그래요. 색은 일어난 거고 공은 안 일어난 거예요. 이걸 가르쳐요. 그래서 이 몸을 위해서 근심하기 전에 이 몸 자체를 먼저 알아라. 귀신을 무서워서 도망가기 전에, 저 귀신이라는 작자가 진짜 있는 건가 그걸 먼저 보면, 나무통뿐이니까 두려울 거 하나도 없죠. 이러니까 진짜 굉장히 깊은 것 같아요. 이 깊은 속에 직접 들어가는 거를 법계 삼매라 그래요. 법계는 내 몸인데 이 깊게 깊게 눈으로 보지 않고, 지혜로 보는 것을 법계삼매라고 그러거든요. 근데 성기는 뭐냐? 법성 성기. 법성이라고 하는 것은 이 우주 만법이 있는데 만 가지 있는데 거기에 평등무위자성이 있어요. 평등해서 둘이 없는 자체 성격. 그 평등무위자성이 아무리 아무리 여러 가지로 변하고 이루어져도 그 평등무위 자성은 그대로다. 그래서 모든 것이 일어난 것은 그 평등무위자성이 일어난 거다. 이걸 성기라 그래요. 그래서 연기 성기. 연기라고 하는 건 일어났을 때 일어난 것이 없다는 게 연기고, 성기는 모든 일어난 게 법성 자체가 일어난 거다. 이걸 성기라 그래요. 이게 법성이다. 평등 무위한 자성이다. 그래서 우주의 절대적 진리가 뭐냐. 이게 딱 주먹하나 해. 이게 평등무위자성이다. 어떤 분은 손가락 하나 딱. 이게 일어났는데 이게 자체가 없고, 평등무위한 자성이 일어난 거다. 근데 죽는 사람한테 죽어서 어디로 갑니까? 그러면 눈을 이렇게 감고 그냥 쓰러져. 이 쓰러지는 게 바로 평등무위자성이 쓰러지는 거다. 지금 몸 죽는 것 외에 딴 데 가서 찾으면 그거는 중생의 고락인 거고, 또 수행자의 해탈인 거예요. 법계인과는 죽는 것 그 자체가 구경의 진리다 이렇게. 죽는 것 자체가 평등무위 법성의 나타남이지, 현상을 떠나서 법성이 없다. 이게 법성성기예요. 진리를 찾느냐 이걸 봐라. 그거 이제 그런 게 많아요. 어떤 사람이 출가해서 암자에서 열심히 시키는 대로 하는데 불교를 한마디도 안 가르쳐줘요. 그래서 “아, 이제 답답해 못 살겠다”고, “난 딴 데로 가겠다”고 그러니까, “어디 갈래?” “나 불교 가르쳐주는 대로 가겠다”고. “그래 나한테도 불교가 조금 있는데.” “그건 뭐예요?” 이 옷에서 먼지 하나를 이렇게 들어서 휘 불어요. 이걸 포말이라 그래요. 이 베 포자, 벼라는 포목이라는 포자하고, 가루 말자가 있어요. 벼가루 포목가루. 이걸 딱 보이니까 그걸 보고 딱 깨달았어요. 이 세상에 모두 보이는 거는 평등무위자성이구나 그런 일이 있었어요. 그래서 이걸 문자로 가르치고 무슨 말로 가르치는 것은 세속적인 방편이지, 실제로는 말 하나하나가 평등무위자성인 거예요. 그래서 이걸 성기라고 그래요. 자성이 다 일어난 거다. 자체는 없다. 근데 이거를 자체 자신으로 보고 이 모양을 자꾸 관리를 해요. 그러니까 관리하면 할수록 점점 불안해져 나무 토막을 귀신으로 보고 도망가면 갈수록 점점 무서워져요. 나무 토막 자체가 귀신이 없다는 걸 딱 아는 순간에 도망갈 일은 없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불기이기는 일어남이 없이 일어난 것은 이게 물건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이게 자성이 일어난 거다. 그래서 이게 물건은 일어남이 없다는 거죠. 불기이기. 일어남이 없이 일어난 것은 법성성기고, 일어났으되 일어남이 없는 것은 법계 연기다. 이게 화엄학의 핵심이에요. 화엄학은 이걸 공부하고 이걸 가르치고 이걸 깨닫는 거예요. 화엄경이 엄청나게 많지만 딱 이거예요. 법계연기 법성성기. 법계 연기는 일어났는데 일어남이 없다는 거예요. 일어난 속에서 가르치는 거고, 법성성기는 일어남이 하나도 없어, 그냥 법성뿐이야. 그 법성이 일어난 거지, 다른 거 일어난 게 없다. 그래가지고 의상조사 법성계 시작이 법성원융무이상이에요. 법성은 다 통해서 둘이 없다. 일어난 것도 법성이고, 안 일어난 것도 법성이고. 내 몸도 법성이고 다른 몸도 법성이고. 그래서 모든 게 일어난 게 법성이다. 둘이 없다. 그리고 마지막 게송이 구래부동명위불(舊來不動名爲佛)이에요. 옛부터 일어난 게 없다. 그 동자는 기는 동이라. 동은 기하라. 움직일 동자나 일어날 기자가 같아요. 옛부터 일어난 거 없는 것이 그게 바로 법성인데, 그걸 알면 중생이라고 안 하고, 부처라고 한다. 그걸 모르면 중생이다, 이렇게 돼요. 간단해요. 그러니까 이게 간단한 게 뭐냐. 이 몸이 모두 인연으로 일어났기 때문에 일어난 게 없다. 이러면 법계 연기고. 이 몸이 법성이다. 평등한 법성이다. 둘이 없는 법성이다. 그래서 몸이 일어난 게 아니라 이 법성이 일어난 거다. 이러면 법성성기예요. 그거 알면 끝나는 거예요. 그럼 근심 걱정할 일이 없어요. 이 법성이 일어나서 법성이 활동하고 법성이 늙고 법성이 아프고 법성이 죽는데, 무엇을 가까이하고 무엇을 멀리 하리오. 그냥 먹고 놀면 돼요. 이 몸이 법성신인데 그래서 천수경에서도 원아조동법성신(願我早同法性身), 내가 빠르게 법성신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그냥 법성신인데, 내가 이 몸이 법성신인 것을 몰랐을 뿐이에요. 법성신을 법성삼매에 딱 들어서 지혜로 깨달으면 그게 법성신이 된 거예요. 이걸 배운 대로 익힌 대로 내 몸은 내 몸이고 늙으면 안 되고 죽으면 안 되고 영원히 젊어져야 되고. 이게 진짜 웃기는 소리요. 법성의 모양이 한 모양으로 고정된 게 아니에요. 근데 인간의 욕심은 한 모양으로 고정되기를 바래요. 안 죽고 싶고, 그래서 제일 허풍 떠는 말이 “무병장수하소서.” 법성에는 이게 병도 법성인데 병이 있으면 어때요? 건강한 것만 법성이 아니에요. 불수자성이니까. “만수무강하소서.” 이런 참 근데 그 소리 들으면 또 좋더라고 또. 그게 그게 문제예요. 문제예요. “살 만큼 사셨으니 오늘 가시지요.” 그래 봐. 신경 그거. 아주 신경질 날 거예요. 그런데 “무병장수 하소서. 만수무강하소서.” 그러면 그게 뻔히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좋아. 그러니까 사람하고 친해지려면 절대 옳은 소리하면 안 돼요. 무조건 그 사람 좋아하는 말을 해야 돼요. 옳은 소리 하면 큰일 나요. 사실 솔직히 말해서, “그대 얼굴이 아주 잘난 건 아니잖아.” 이따우 소리 했다가는 큰일 나요. 아주 큰일 나요. 그럼 어떻게 해야 되냐. “그대 얼굴이 최고 이뻐.”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얼굴이야. 이런 소리를 좋아하니까 사랑을 하려면 그런 것부터 배워야 돼요. 그 사람이 좋아하는 말만 해야지. 옳은 소리는 절대 하지 마라. 근데 나이가 든 부부들 보면 전부 옳은 소리만 하더라고. 그러니까 이렇게 문제가 되는 옳은 소리하면 안 돼요. 그냥 좋아하는 말만 해야 돼요. 이게 이제 중생의 집착하고 법성의 원리하고 틀린 거예요. 법성의 원리는 모든 게 법성성기니까 하나도 다른 게 없어요. 법성원융무이상이에요. 그래가지고 법성은 성기니 법성은 성이 일어난 것이니 법성 외에는 없다. 그러니까 기기가 법성이다. 일어나고 일어난 것이 전부 법성뿐이다. 이거 법계 연기는 기기가 무기다. 법계 연기는 일어난 것마다 일어난 것이 없다. 이봐요. 이게 법상이잖아요. 이 법상이 일어났는데 이게 뭐예요? 이게 나무뿐이지, 나무. 칠 뿐이고 일어났지만 일어난 게 없는 거예요. 근데 법성성기는 이것 자체가 법성이 일어난 거다. 그거 얼마나 쉬워. 이 몸이 일어났지만 일어난 게 없는 거다. 그럼 법계연기고. 이 몸 자체가 법성원융무이상, 그 법성이 일어난 거다. 늙는 것도 법성이다. 죽는 것도 법성이다. 참 이게 기가 막히네. 이게 아주, 아주 기가 막혀요. 그래서 이게 이런 거를 이제 선지식들이 비유로 계속 가르치고 있는데, 향나무를 가지고, 향기가 진동하는 향나무를 가지고 조각을 해요. 그 향을 전단향이라고 하거든요. 전단. 전단. 향나무 이름을 전단이라고도 해요. 전단목으로, 전단향나무로 조각을 하는데, 중생 모습도 조각을 해요. 또 여래 모습도 조각을 해요. 또 보살 모습도 조각을 하고, 전단목고중생상(栴檀木做衆生像) 급여여래보살형(及與如來菩薩形). 그런데, 했는데 모양은 다 조각된 모양이 중생상, 여래상, 보살상 다 틀리잖아요. 이제 이게 일어난 거예요. 이게 일어났는데 그 조각한 자료를 보면 중생의 모습을 조각한 것도 향나무요. 여래 모습을 조각한 것도 향나무요. 보살 모습을 조각한 것도 향나무예요. 그래서 그 향나무를 법성으로 보는 거예요. 법성. 그리고 일어난 거를 그 모양 모양으로 봐요. 그 모양 모양이 일어났는데 그 모양 하나하나가 다 향나무이기 때문에, 전부 일어난 것마다 향나무인 거예요. 그래서 이 세상에 나타난 것마다 법성원융무이상 그 법성이 나타난 거다. 그러니까 견성을 해라. 그 법성을 봐라. 이거거든. 마치겠습니다.
-
[국행수륙재] 10월 19일 국행수륙재 회향 법문
성파종정예하 2024-10-19
이곳 진관사에서 국행수륙대재를 49일 전부터 시작해서 오늘이 회향하는 날인데, 국행수륙대재라 하면 나라 국가 차원에서 이 수륙대재를 하는 거기 때문에, 우리나라 절에서는 물론이고 전통 무형 문화 차원에서도 세계적인 그런 무형문화재입니다. 그래서 49일 전부터 계호 스님, 법해 스님, 여러 대중 스님들께서 지극 정성으로 모든 있는 힘과 정성을 다해서 국행수륙대재를 오늘까지 해 왔습니다. 그동안에 여러분들이 참여하셔가지고 저쪽에 계시는 저런 분들도 국행이기 때문에 저런 복장을 하고 다 나왔거든요. 그래서 나라에서 하는 그런 행사이고, 또 절에서도 할 수 있는 데까지 모든 이 장엄이나 모든 것을 이렇게 원만히 잘 갖춰가지고, 이 시대에는 전 세계적으로 이러한 행사가 잘 없을 정도로 대표적인 그런 행사입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잘 해왔기 때문에 오늘 법문은 할 게 없어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다 해서 결론을 내놨기 때문에, 결론 이거 맞나 안 맞나 그것만 증명하면 됩니다. 그래서 이번 행사는 여러분들이 다 합심해서 굉장히 잘했기 때문에, <잘 됐다, 잘했다.> 이거로써 법문은 이때까지 여러분들이 행사한 그 자체가 다 법문이라. 그래서 다른 건 할 거 없고, 또 왔으니까 쓸데없는 말을 하는 게 뭐냐, 사족이라고 하거든. 사족. 여기까지 왔으니까 사족을 붙여서 조금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이 우주를 시방세계라고 그러거든요. 시방세계. 시방세계는 무엇 때문에 시방세계냐. 동서남북 중앙, 오방이거든. 오방에서 상하를 합해가지고 시방이라고 그러거든. 그러니까 이 우주 전체를 통틀어서 시방세계라고 그럽니다. 그래서 시방세계 부처님 전에, 시방세계 불보살님 전에, 시방세계의 유주무주 고혼들을 다 불러서 이고득락(離苦得樂)하도록 하는 그런 행사이기 때문에, 얼마나 중요한 행사냐 이거. 옛날에 우리가 이걸 전통적으로 했다 해서 그런 게 아니라, 이 시대도 그렇고 이보다 더한 다음 시대라도 이러한 것은 정말로 인류사회에서 더 할 수 없는 그런 훌륭한 행사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아마 그렇게 아셔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 인류가 지금도 어느 나라에서는 전쟁을 하고, 사람이 많이 죽고, 또 전쟁으로 인해서 그런 거, 또 천재 지변으로 인해서 그런 거, 여러 가지 질병으로도 그렇고, 이래가지고 비명 객사한 사람들도 많고 그 사람들이 다 지금 우주의 시방세계에 무주 고혼으로 다 있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그런 시방세계의 모든 유주 무주의 애혼들을 갖다가 다 이 자리에 불러모아서, 49일 전부터 오늘날까지 고구정녕(苦口叮嚀)하게, 고구정녕하게 법문을 읽히고, 갖은 또 수단이라 하면 수단일 수가 있습니다, 음악을 들려주고 법문을 하고 여러 가지 장엄을 하고 이래서 그 고혼들을 달래는 그런 행사를 이때까지 해왔거든요. 그래서 오늘 이 시간쯤 되면 어떤 지옥고에 떨어져 있는 고혼도 다 이고득락할 거라고 믿습니다. 여러분 그렇지요? 그래서 지금 굉장히 좀 강조돼야 할 문제가 뭐냐 하면, 너무 인륜의, 인륜을 갖다가 좀 등한시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우리가 조상이나 고국이나 고향이나, 우리가 어디서 왔느냐 이거라요. 그래서 온 곳에 대한 그 애정이라 할까 그런 것을 우리가 늘 생각해야 되는데, 너무 눈앞에 보이는 것만 생각해 가지고 사고들이 많이 나요. 사고들이 많이 나는데, 왜 사고가 나느냐. 너무 바깥만 쳐다보고 가다 보니까, 발 밑에 웅덩이가 있는지 뭐가 있는지 돌이 있는지 모르고 자빠지는 거라. 그래서 조고각하(照顧脚下)라. 다리 밑을 잘 보고 다녀라 이카거든. 먼 산만 보고 다니다가는 헛다리 짚는다 카잖아요. 헛다리 짚어가 다치거든. 그래서 우리가 먼 산을 보지 않는 거는 뭐냐. 자기가 첫째는 자기 몸을 돌아봐야 되고, 그다음에 자기 가정을 돌아봐야 되고, 그다음에 이웃을 돌아봐야 되고, 그다음에 사회를 돌아봐야 되고, 그다음에 자기 국가를 돌아봐야 되고, 이것이 선결문제라. 그런 선결문제를 놔두고 근자를 불친이오니(近者不親) 불감구원(不敢求遠)이리오. 가까운 것도 보지 못하거니 어찌 먼 데 걸 말하겠나, 이거거든요. 이 자리에 모인 분들은 다 그런 문제에 대해서 내가 두말하면 안 될 정도로 여러분들은 다 알고 다 시행하는 분들이라고 나는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우리가 역대로 무주 고혼을 갖다가 천도하기도 하고, 또 자기 조상을 천도하기도 하고, 그래서 우리가 절에서는 시왕을 모셔놓고 거기에다가 이제 사람이 죽으면 49일 동안 우리가 무슨 범죄를 저질러서 유치장에 들어가 있으면 49일 동안 미결수, 미결수 한 가지라. 그래서 49일 동안 미결수 상태에 있을 때 우리가 49일 동안 자꾸 재를 지내고, 그 영가도 달래고 이래가지고 이고득락하도록 우리가 기도를 해주고 하는데, 거기 도산지옥이 있고, 화탕지옥이 있고, 여러 가지 지옥을 다 해놨어요. 해놨는데 거기 가면 안 되잖아요. 누가 도산지옥에 가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노. 그래서 그런 걸 다 해놔 놓고 이거 보라 이거라. 그러면 영가에게만 그게 해당되는 게 아니고 살아있는 사람이 그걸 보고 이런 짓을 하면은 독사지옥을 가는구나, 이런 짓을 하면 화탕지옥에 가는구나 하는 것을 미리 알리는 거라. 미리 미리 예고거든. 예고는 뭐 때문에 필요하냐. 예방 때문에 필요한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법도 그래요. 법도 범죄를 저지른 사람 잡아들이는 것만 능사가 아니거든요. 그래 못 하도록 사전에 교육시키고, 사전에 알려주는 그것이 더 중요하다 이거라. 병도 그래요. 여기병후능복약(與其病後能服藥)으론 불약병전능자방(不若病前能自防)이라. 병 난 다음에 약을 먹는 것보다는 병나기 전에 예방하는 것이 낫다 이거거든요. 그러면은 어디든지 해당하거든. 해당하기 때문에 우리 여기 모인 사람들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그런 말이 필요 없겠지만은, 여기에 참석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좀 듣도록 해야 돼. 방송국에서 듣도록 합니까? 네. 그래서 자신을 먼저 돌보고 이 나쁜 짓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미리 알려가지고 선행을 베풀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보살행입니다. 그래서 진관사는 우리나라에 여러 사찰이 많이 있지만은, 아주 모범적으로 그런 행사도 많이 하고, 그렇게 모범적으로 잘, 범죄 같으면 예방, 또 병 같으면 미리 병 안 나도록 하는 거, 전 사회의 그런 것을 진관사에서는 솔선해서 하고 있다, 그렇게 나는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일 중요한 것이 그렇기 때문에, 지금, 옛날도 그렇지만, 지금도 요구하는 것이 뭐겠습니까? 요새 전쟁을 일으키는 사람, 마약을 하는 사람, 술을 많이 먹고 교통사고를 내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다 뭐 때문에 그렇습니까? 그 뭐 먹을 게 없어서 그렇습니까? 배가 고파서 그렇습니까? 정신이 비뚤어져서 그렇거든요. 정신이. 정신이 비뚤어져서 그런데, 우리가 날씨가 여름에 되게 가물 때 저수지에 물이 다 빠지고 저수지 바닥이 엉거름이라 하는데, 금이 쭉쭉쭉 갈라져 있거든. 그러니까 TV에도 한 번씩 나오는데 보면 물이 말라 갈라져 있다 이거라.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만물이 자생하는 데 있어가지고 수분이 없으면 안 되잖아요. 사람이 정신이 가물어가지고 땅이 갈라지듯이 정신이 메마르면 그런 사고가 난다 이거예요. 그래서 엉뚱한 짓을 하게 되는 것이 그래 그런 거라. 그래서 그런 것을 우리 불교계에서는 예방하는 그런 행을 해야 되기 때문에 거기서 진관사가 아주 솔선적으로 잘한다 이렇게 이제 봅니다. 이런 것을 다 왜 모르느냐 이거라요. 공지끽식 이위기장호대 부지 학법이 개치심(共知喫食 而慰飢腸 不知 學法而 改癡心)이라. 배가 고프면 밥 먹어 갖고 배 채울 줄은 누구나 다 알아요. 근데 이 불법을 잘 배워가지고 어리석은 마음을 개선해야 된다, 그거는 지금 잘 모르는 거라. 그래서 배가 고파서 밥을 먹어야 되는 거와 같이 그거는 누구나 다 알아. 아는데 불법을 잘 닦아서 마음을 고쳐가지고 어리석은 마음을 고치는 줄은 알지 못한다. 이게 그래서 이제 옛날에 조사 스님들이 다 그런 걸 안타깝게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여러분들은 부지 학법이 개치심이라, 법을 배워가지고 어리석은 마음을 고쳐야 된다 하는 걸 알지 못해서는 안 되겠지요. 우리 스님들은 잘 알아. 저쪽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모르겠다. 그도 잘 알 거야 아마. 그래서 세혹진제무일물 대원경이임우유(細惑盡除無一物 大圓鏡裏任優遊)로다나 나무아미타불 세혹진제무일물, 세세한 조만한 의혹도 다 없애버리면 한 물건도 없어. 대원경상에 임우유로다. 대원경, 큰 거울 앞에 마음껏 놀아라. 그런 이제 법문이 있거든요. 그래서 법문은 이쯤 하고 그다음에 시간도 없지만은, 농담을 좀 해야 되는데, 아까 시방세계를 다 이야기했잖아요. 그 시방세계가 앞도 없고 뒤도 없고 뭐 높은 것도 없고 낮은 것도 없거든요. 그런데 그것을 기준을 잡을 데가 없어요. 그런데 불교가 여러 나라에 다 있지만은 우리나라의 불교는 정말 우리 선사들께서 너무 잘했다고 봅니다. 왜 그러냐. 탑이 다른 나라에는 그냥 높이 쌓아올리는 게 탑이라. 근데 우리나라에는 3층 석탑, 5층탑, 7층탑, 9층탑 이래 있거든요. 3층 탑은 뭐 때문에 3층 탑입니까? 저쪽에 아는 사람 없습니까? 3층 탑. 주지스님처럼 이렇게 앉아 있는 게 3층 탑이라. 여기 1층, 몸통 2층, 머리 3층, 3층 탑이거든. 그럼 5층 탑은 어이 되나. 일어서면 5층탑이라. 7층 탑은 어이 되나. 이(손들고) 서면 7층이다. 9층 탑은 이 손가락까지 하면 9층 탑이 되는 거라. 그래서 여러 나라에 탑이 있는데 우리나라 탑은 딱 사람의 형상 그대로라. 우리가 이 육신을 가지고 있을 때 이런데, 육신이 없으면 뭐를 가지고 육신을 표현하느냐 이거라. 탑을 가지고 육신을 표현했어요. 그래서 그 탑을 모시고 그 안에 사리를 모시거든요. 그래서 세계 불교에서 우리나라 불교가 가장 모범되고 표준적인 불교라. 그래서 그런 것도 여러분들은 좀 아까 농담이라 했지만, 이거 농담 아닙니다. 3층, 5층, 7층, 9층 탑이라. 그래서 생전에는 살아있을 때는 9층탑이 움직이고, 사후에는 돌탑으로 해가지고 움직이지 않는 탑이라. 그래서 그게 있고. 그다음에 이제 구룡이라는 말을 많이 쓰거든. 그래서 이제 유교에서도 홍범구주라고 말하고, 불교에서도 구룡이라고 많이 하고 통도사에도 구룡지라고 그러고, 다 구룡을 많이 쓰는데 그 구층탑을 보면 구룡이잖아요. 그래서 그보다 더 한 것이 뭐냐. 하나 둘 세아려 보소. 하나(오른눈) 둘(왼눈) 서이(오른귀) 너이(왼쪽귀) 다섯(오른쪽 콧구멍) 여섯(왼쪽 콧구멍) 일곱(입) 북두칠성이라. 그래서 상칠하이(上七下二)라고 그러거든. 위에는 북두칠성이 있잖아요. 밑에 안 보이는 데는 두 개라. 안 보이는데 알겠지요. 그래서 합하면 이자 9개거든. 9개라서 그걸 이제 구중궁궐이라고 하기도 하고, 구룡이라고 하기도 하고 하거든. 그러면 사람이 돌아다니면 구룡이 돌아다니는 거라. 구룡이 앉았다 섰다 하는 거고, 구룡이 왔다 갔다 하는 거라. 그래서 여기 있는 사람들은 전부 구룡이다. 구룡 아닌 사람 없어요. 그래서 여기뿐 아니라 이 지구상에 삼라만상이 다 있는데, 그중에서 사람 몸 가진 거는 흑인이고, 백인이고, 한인이고 간에 전부 다 구룡이라. 다 똑같아요. 그래서 구룡을 잘 알아서 잘 다스려야, 자기 자신도 사고가 안 나고, 또 이 사회도 질서가 잘 유지된다 이거래요. 너무 알기 쉬운 걸 말했죠. 구룡 알았습니까? 전에 알았습니까? 이제 알았습니까? 이제 알았지요. 그래서 구룡은 보통 영험한 게 아니라. 그래서 용득 여의주(龍得如意) 연후에 승천이라 용이 여의주를 얻은 연후에 승천한다 그러죠. 여의주를 못 얻으면 개천에서 엎드려 있어야 돼. 그래서 용은 용인데 개천에 엎드려 가 있는 용을 할 거냐, 구만리 장천을 마음대로 날아다니는 용을 할 거냐. 여러분 말해보세요. 개천에 엎드린 용으로 하기 싫지요? 그래서 여의주를 얻어서 호풍환우(呼風喚雨)를 하는 거라. 바람도 불고 비도 오게 하는 그런 작용을 할 수 있는. 여러분들 오늘 진관사에 와서 이 국행수륙대재에 참석한 사람은 용이 돼가 가는 그런 큰 선물을 얻었다고 생각하면, 박수도 안 나오나. 전부 조금 적다. 그래서 이 국행수륙대재에 참여하고, 무주 유주 고혼들을 다 천도하고, 그것만 천도를 한 게 아니라 나도 무슨 천도가 있어야 되지 않나 이거라. 그래서 아직 죽지도 안 했는데 천도라 하면 뭐 하고, 오늘 구룡으로 화하는 거, 구룡으로 변하는 이것이. 오늘 잘 왔지요. 그래서 그렇게 하면 될 거라고 봅니다. 원이차공덕 보급어일체 아등여중생 당생극락국 동견무량수 개공성불도
-
[천일기도]]대웅전 관음천일기도 회향 법문
종범 큰스님 2024-10-11
--現在佛慈悲와 當來出現佛----현재불자비와 당래출현불-- 안녕하십니까? 오늘이 무슨 법회에요? 천일기도 회향법회. 천일기도 회향을 축하드립니다. 100일 기도하기도 힘든데, 천일을 기도를 하시고, 참 대단한 인연이에요. 오늘 천일기도 회향 법문은 현재불자비(現在佛慈悲), 현재불자비, 당래불, 당래출현불(當來出現佛), 현재불자비와, 당래라고 하면 미래를 말하는 거에요, 당래출현불, 이런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於諸病苦 爲作良醫 於失道者 示其正路어제병고 위작양의 어실도자 시기정로於闇夜中 爲作光明 於貧窮者 令得伏藏 (普賢行願品)어암야중 위작광명 어빈궁자 영득복장 (보현행원품) 이게 뭔 말이냐 하면, 부처님의 자비를 말씀하는 건데요. 자비가 뭐냐. 모든 병고에는, 질병과 고뇌에는 좋은 의원이 되어 주시고, 어실도자(於失道者), 길을 잃은 자에게는 그 바른길을 보여주시고, 어암야중 위작광명(於闇夜中 爲作光明)이라, 깜깜한 어두운 밤에는 광명이 되어 주시고, 어빈궁자 영득복장(於貧窮者 令得伏藏)이라,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에게는 한 번 얻으면 영원히 쓸 수 있는 그런 금은 창고, 그 금은 창고를 얻게 해주신다. 이것이 부처님의 자비다. 이렇게 공양 올릴 때마다 염불하는 그런 내용이고, 보현행원품에서 말씀하신 그런 내용이에요. 그러면 병고라고 그랬는데 병고가 뭐냐. 병은 몸이 없으면 병이 없거든요. 병은 몸에서 오는데, 몸은 중생이 느끼는 이 사대육신, 지수화풍 사대, 근육으로 된 이 육신이 있고요. 이제 제불보살이 가지고 있는 몸은 여여무주 진여불성. 여여(如如)해요. 하늘이 무너져도 달라짐이 없어요. 여여해. 같아, 같아. 땅이 무너져도 여여해. 이 몸이 죽어도 여야해. 근데 이 몸은 여여이 변만법계 하는데, 다 변함없는 모습으로 법계에 가득한데, 또 시방무주예요. 시방에 머무는 데가 없어. 무주(無住). 봄이 모든 꽃을 피우지만, 봄은 어느 꽃에도 머물지 않아요. 그래서 부처님이 깨달으신 몸을 여여신이라, 무주신이라, 여여한 몸이다.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 그런 몸이다. 그런 몸은 진여불성(眞如佛性)이다. 참 아는 몸이다. 불성이다. 이게 이제 불보살의 몸인데, 범부의 몸은 이 사대육신으로 몸을 삼기 때문에 병이 많아요. 병이 많아. 병 중에 제일 많은 병이 배고픈 병인데, 이 배고픈 병은 염치도 없고, 숫자도 없어서, 먹고 조금 있으면 배고파요. 그래서 이 배고픈 병 다 고치는 날은 이 몸이 숨지는 날이에요. 이 몸이 숨지기 전에는 배고픈 병은 못 고친다. 그런 병도 있고, 아픈 병도 있고, 뭐 힘이 빠지는 병도 있고, 늙는 병도 있고, 몸에는 그렇게 병고가 많아요. 그런데 그 병고를 어떻게 가르치냐. 죽지 않는 몸, 여여신, 진여신, 무주신, 이런 몸을 떡 얻는 순간에 몸의 병고는 없어요. 그래서 모든 병고에서 훌륭한 의원이 돼 주신다, 그 말이고요. 어실도자 시기정로(於失道者 示其正路)라. 길이라는 게 뭐냐. 불성의 길이 있고, 진여의 길이 있고, 열반의 길이 있는데, 이 몸을 내 몸으로 딱 집착하는 순간에 불성, 진여, 열반, 다 잃어버렸어요. 그래서 그 여여의 길로 돌아가도록, 불성의 길로 돌아가도록, 그 바른길을 보여주신다. 어암야중 위작광명(於闇夜中 爲作光明)이라. 어두운 밤이라, 어두운 밤이 뭐냐. 이 해가 져서 어두운 건 어두운 게 아니에요. 그건 자성이 없어서, 해를 등진 인연으로 나타나는 거기 때문에, 해를 등지지 아니하면 어두움은 없어져요. 또 이 밝음도 밝음이 아니라, 밝음도 자성이 없어서, 이 해를 등져버리면 밝음은 또 없어져 버려요. 인연으로 생긴 것은 없는 거다. 그래서 밝으면 밝음이 없고, 어두우면 어둠이 없어서, 이 육안을 몸에 있는 눈으로 본 어두움은 어두움이 아니다. 그럼 뭐가 어둠이냐. 불성을 보지 못하는 어두움, 무명(無明), 무명의 어두움이다. 불성이 그게 난데, 불성이 내 몸인데, 그 내 몸을 내가 보지 못하는 어둠이 그게 어두움이다, 그거죠. 그래서 어두운 밤에는 광명이 되어 주신다, 그거고요. 어빈궁자에겐 영득복장(於貧窮者 令得伏藏)이라. 빈궁이라는 게 뭔가. 이 육신의 몸을 자기 몸으로 삼다 보니까 항상 가난해요. 왜냐. 이 몸을 위해서 모든 게 필요해요. 그래서 눈이 가난하고, 귀가 가난하고, 코가 가난하고, 입이 가난하고, 손이 가난하고. 그래가지고 눈, 귀가 다 가난해. 그래서 어찌 되냐. 눈은 이 몸을 위해서 뭐 좋은 게 없나 항상 살펴요. 이건 나이 많은 사람이나 젊은 사람이나 똑같아. 나이 많다고 뭐 안 보냐. 뭐 그거 아니에요. 절대 다 봐요, 나이 많아도. 다만 속도가 좀 느릴 뿐이여. 왜 보냐. 이게 이 몸을 위해서 필요한 게 많아. 그래서 눈은 항상 뭐를 얻으려고, 뭘 구하려고 계속 봐요. 항상 빈털터리로, 가진 거 하나도 없는 상태로, 계속 보는 거예요. 그래서 눈이 가난하다. 귀가 가난하다. 뭐 좋은 소리 없나 싶어서 계속 들으려고 그래요. 이거 노인인데도 더 들으려고 그래요. 노인은 잘 안 들리니까, 더 들으려고 용을 쓰고. 들어서 뭐 할래. 이 몸에 필요하니까 그래요. 안 들어놓으면 이 몸을 유지할 수가 없어요. 또 코도 그렇지. 계속 냄새를 맡아서 이 몸이 좋은 거는 계속 구하고, 안 좋은 거는 안 구하고 이러려고. 혀도 그렇고 계속 맛보죠. 손도 좋지 않은 먼지는 계속 닦아내야 되고, 좋은 건 계속 맞아들여야 되고. 닦아내고 맞이하고, 닦아내고 맞이하고 하는 게, 이게 손이 평생 하는 일이에요. 이러니까 범부는 눈, 귀, 코, 입, 손, 발, 온몸이 가난해요. 온몸이 가난해, 한낮에도 가만히 있는 걸 두려워해요. 어디 가서 뭔 소리 들어야 되는데. 어디 가서 뭐 봐야 되는데. 빈궁자예요. 그러면 그 불성의 보배를 다 알게 되면 가난 없어요. 또 배고프고 허직나는 것도 없어. 영절기허(永絕飢虛)라. 영절기허. 배고픈 거 허증나는 거 영원히 끊어진다. 그게 이제 그렇게 인도하는 것이 부처님인데 그걸 부처님의 자비라고 한다. 어제병고 위작양의 어실도자 시기정로 어암야중 위작광명 어빈궁자 영득복장. 부처님의 자비. 참 좋다. 좋아. 부처님의 자비, 정말 좋다. 이게 이제 현재불자비예요. 현재 세상에 출연한 부처님의 자비다. 근데 경전에 유마경이라는 경이 있는데, 그 유마경의 골자가 유마와 문수가 대화를 하는 것이 유마경의 핵심인데, 유마는 뭔 사람이냐 그러면, 유마라는 게 한문으로 번역하면, 깨끗할 정자, 이름 명자, 정명(淨名)이라 그래요. 정명. 정명이라는 게 뭐냐. 세상에는 이름이 있는데, 모든 이름에 물들지 않고, 모든 이름은 허명이라는 걸 알아. 일체의 명칭은 허명이다, 이걸 알아요. 이게 얼마나 좋은 건지 몰라요. 무슨 가요에 그런 게 있다고. <살아서는 얻지 못하는 이름 하나 때문에> 뭐 이런 거 있더라. 이름은 다 허명이에요. 무슨 이름이든지. 헛된 거예요. 그걸 알아서 이름에 절대 물들지 않는 게 유마에요. 그래서 이름 자체가 정명이에요. 정명. 그럼 문수는 누구냐? 문수는 일체의 상이 상이 없다는 걸 알아. 상에서 무상을 안다. 모두 형상이잖아요. 형상. 형상은 다 헛되다. 그래서 형상은 다 상이 없다. 이걸 알아요. 그래서 이 두 분이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하나는 이름이 다 헛되다는 걸 아는 유마, 하나는 모든 형상이 다 헛되다는 걸 아는 문수. 이야기를 주고받는 게 그게 유마경의 핵심이에요. 다 상에 집착하고, 상에 어리석고, 상에 매달려 산다고요. 그런데 이 불성으로 들어가려면 제상이 비상(諸相非相)임을 봐야 돼요. 모든 상이 상이 아님을 봐야 그 죽음이 없는 불성의 세계로 들어가요. 약견제상이 비상이면 즉견여래다. 상에 속으면 못 들어가. 한 번 누구를 만났는데 아침마다 저 동방에서 솟아오르는 태양을 하염없이 보고 있다고 그래요. 기도 안 차더라고. 내가. “범소유상이 개시허망(凡所有相 皆是虛妄)이라는 거 모르나.” “아이 그래도 보면 좋아요.” 이래. 조금 나이가 들면요, 뭘 가르쳐줘도 듣지도 않아요. 안 들어, 안 들어. 이제 끝난 거예요. 저 해라는 게 저게, 인연으로 생겼다가 인연으로 사라지는 거, 헛된 건데, 상은 다 헛된 거예요. 몸이라는 형상도 헛된 거고, 지구라는 형상도 헛된 거고, 눈에 보이는 거 다 헛된 거고, 귀에 들리는 거 다 헛된 거고, 그 상은 허상이다. 이걸 알아서, 상에서 항상 무상을 보고 있는 게 문수지혜거든요. 이름에서 항상 이름이 없는 걸 보는 게 유마의 지혜고. 그 두 사람이 만났어. 대화가 이루어지는데. 묻는 건 문수고, 대답하는 건 유마에요. ①又問身 孰爲本 答曰欲貪 爲本 又問欲貪 孰爲本 答曰虛妄分別 우문신 숙위본 답왈욕탐 위본 우문욕탐 숙위본 답왈허망분별爲本 又問虚妄分別 孰爲本 答曰轉倒想 爲本 又問轉倒想 위본 우문허망분별 숙위본 답왈전도상 위본 우문전도상孰爲本 答曰 無住 爲本 又問無住 孰爲本 答曰無住 숙위본 답왈 무주 위본 우문무주 숙위본 답왕무주則無本 文殊師利 從無住本 立一切法 (維摩經 觀衆生品)즉무본 문수사리 종무주본 입일체법 (유마경 관중생품) “몸은 무엇이 근본입니까?” 하니까 유마가 대답을 하기를, “몸이라는 것은 욕망이라는 욕자, 탐할 탐자, 욕탐(欲貪)이 근본이다.” 이렇게 대답을 해요. 이 몸은 욕탐의 산물이에요. 이건 내 몸이다라는 욕심과 탐욕이 없으면 이 몸을 유지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뭐 오래 살았다고 축하하는데, 그거 절대 축하받을 일이 아니에요. 100년을 살았으면 100년을 이 몸을 위해서 욕탐을 일으켰다는 거예요.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지. 30년을 살았으면, 30년을 이 몸을 위해서 욕탐을 일으켰다는 거예요. 이 몸을 위해서 먹어야죠. 몸을 위해서 입어야죠. 몸을 위해서 잠재워야죠. 이 기가 막힌 말이에요. 그러면 “욕탐은 무엇이 근본입니까?” 하니까 “허망분별(虛妄分別)이 근본이다.” 이 우주법계는 여여무주인데, 여여이 머무는 데가 없는 건데, 이거는 좋은 거고, 이거는 나쁜 거고, 이건 내 몸이고, 이건 내 몸이 아니고, 이렇게 허망하게 나눈단 말이에요. 분별은 나눠. 그래서 둘로 보는 것이 있으면 범부고, 둘로 보는 것이 없으면 불보살이다. 불보살은 둘로 보질 않아요. 둘로 보면 다 범부여. 그걸 둘로 본다는 얘기를 불교에서는 분별이라고 그래요. 일반 세속에서는 상식이라 그래요. 무분별하게 그러면, 상식 없이 이러잖아요. 불교에서는 나누는 걸 분별이라고 그래요. 나눠. 다르게 나눈다. 그다음에 “허망분별은 무엇이 근본입니까? ” “전도상(轉倒想)이 근본이다.” 뒤바뀐 생각. 이 우주만상이 다 자기 몸인데, 요 자기 육신만을 위해서 탐욕을 느끼고, 집착을 하니까, 하나를 둘로 나누는 전도상. 이미 자기 집에 있는데 다시 자기 집을 찾는, 자기 집에서 자기 집 찾는 거와 같은, 이미 머리가 위에 있는데, 머리를 땅에 박는 거와 같은 전도상이 그것이 근본이다. 이렇게 대답을 해요. “또 전도상은 무엇이 근본입니까?” 그러니까 “전도상은 무주(無住)가 근본이다.” 본래 머무는 데가 없는 여여무분별 그게 근본이다. 그러면 또 “무주는 무엇이 근본입니까?” 그러니까 “무주는 무본(無本)이다.” 근본이 없다. 근본이 없다는 얘기는 지말(枝末)도 없다. 이 근본과 지말을 나누는 건 무명이고, 이게 근본, 이게 턱 이래보면 이것이 근본이 따로 있느냐, 지말이 따로 있느냐, 그냥 이게 여여상일 뿐이에요. 이게 여여상. 여여일상을 근본상, 지말상 이렇게 분별을 하면 그거는 허망분별이다. 전도상이다. 그래서 언제 사람이 평화로울 수 있느냐 하면, 자기 생각 속에서 두 가지가 사라졌을 때, 무이에 들어갔을 때, 둘이 없는데 들어갔을 때. 그럼 내 생각이 지금 둘이 없는데 들어갔나. 택도 없어요. 딱 생각하면 멀고 가까운 거 생각하고, 보이고 안 보이는 생각하고, 오고 가는 거 생각하고 전부 둘이여. 그러면 이 둘이 없는데 어떻게 들어가느냐. 딱 본래 눈을 떴을 때 개안, 이 진여불성의 눈을 딱 떴을 때 그때 둘이 없어요. 참세계에 눈을 뜨지 못하면 늘 둘 속에서 살아요. 옳은 거 아니면 그른 거, 죽는 거 아니면 사는 거. 무주는 무본이라, 근본이 없어. 근본이 없는데 입일체법(立一切法)이라. 모든 걸 다 세운다. 근본이 하나도 없지만, 일체법을 다 세운다. 일체법을 다 세우지만 거기에는 머무는 것이 없다. -이게 이제 우주 밖에 통신삼매, 우주 밖에가 아니라 우주법계인데, 나이 들면 이래요. 입술이 내 마음대로 안 돼요.- 우주법계 통신삼매, 통신이라는 거는 온몸이라는 소리예요. 온몸. 우주법계가 온몸, 그냥 자기 몸이에요. 그 삼매에 들기 전에는 둘이 없어지질 않아요. 우주법계가 전체로 통째로 내 몸이다. 딱 들면 둘이 없어요. 그렇기 전에는 전부 둘로 봐서 가난해. 그래가지고 그 가난을 어디서 면해야 되는가. 요 복장(伏藏)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 복이라는 거는 숨겨졌다 이 말이에요. 엎드릴 복자인데, 눈에 보이지 않는데 진금장(眞金藏), 진금으로 가득한 창고가 있다. 이걸 복장이라고 그러는데. ②善男子 我者 即是如來藏義 一切衆生 悉有佛性 即是我義 선남자 아자 즉시여래장의 일체중생 실유불성 즉시아의如是我義 從本已來 常爲無量煩惱所覆 是故衆生 不能得見여시아의 종본이래 상위무량번뇌소복 시고중생 불능득견善男子 如貧女人舍內 多有真金之藏(涅槃經 如來性品)선남자 여빈여인사내 다유진금지장(열반경 여래성품) 선남자(善男子)야, 아자(我者)는 나라. 나라고 하는 것은 이 사대육신이 아니라 진여불성이 나다. 이 사대육신은 여러 가지 인연에 의해서 생겼다가 인연에 의해서 사라지는 거예요. 그런데 이놈을 나라고 막 계속 욕탐을 내서 하염없이 집착을 하니, 이 녀석이 자기가 집착한다고 가만히 있나. 이 몸은 사정이 없어요. 이 몸은 어머니도 없고요. 아버지도 없고요. 아들도 없고요. 부모도 없어요. 이 몸은 그냥 갈 때 가는 거예요. 어머니 몸이라고 뭐 안 가고, 무슨 몸이라고 가고, 그런 거 절대 없어요. 근데 나라고 하는 것은 곧 진여불성이다. 일체중생이 다 진여불성이 있다. 근데 이 진여불성이 말이여. 종본이래(從本已來)로, 근본으로부터 오면서, 위무량 번뇌소복(常爲無量煩惱所覆)이라, 한량없는 번뇌에 이게 뒤덮여 있어. 이제 근심 걱정하는 거, 둘러보는 거 좋고, 나쁘고 생각하는 거. 근데 이 진정 불성은 그냥 거기 있어요. 번뇌 속에. 아무리 번뇌가 끼어들어도 진여불성은 물드는 법이 없어. 그건 마치 월인천강이라. 달이 천 가지 만 가지 강의 그림자를 들여오면, 달이 아무리 그 물속에 그림자를 드리워도 물속에 달이 없어요. 아무리 달이 많이 비춰도 물속엔 달이 없어. 그거와 같이 번뇌가 아무리 진여불성에 꼬여들어도 진여불성은 번뇌에 물드는 법이 없다. 그러면 나의 번뇌심, 나의 청정심, 나의 청정심은 내가 근심 걱정할 때 어디 있었나? 그럼 나의 그 진여불성 청정심은 근심 걱정하는 그 속에 있어요. 근심 걱정하는 마음 따로고, 청정한 마음 따로 그게 아니라, 그 속에 그냥 있어요. 물 다르고 달빛 다른 게 아니라, 달빛 속에 물이 있고 그냥 있는 거예요. 근데 아무리 달이 비쳐도 그 물이 달에 물들질 않아요. 그래서 그걸 묘하다고 하는 거예요. 미묘심이라, 미묘. 아무리 번뇌를 수억 만 년을 일으켜도 진여불성이 번뇌에 물들지 않는다. 야 참 기가 막힌 거에요. 그래가지고 중생이 불능득견(不能得見)이라, 보지 못한다. 마치 빈녀인사내(如貧女人舍內)에, 가난한 여인의 집안에, 다유진금지장(多有真金之藏)이라. 진금으로 저장된 것이 많이 있는 거와 같다. 그러면 빈인사내, 가난한 집에, 가난한 집인데 그 집 안에 땅을 파보니까 거기에는 그저 진금 보배가 가득히 쌓여 있어요. 가난한 집안에. 근데 그 진금보배가 거기 쌓여 있는 줄 모르고 계속 가난을 걱정하고 사는 거예요. 그래서 가난한 집 땅속에 진금의 창고가 가득한 걸 알고 여기 파보면 진금이 들어있다. 안 믿어. 안 믿어요. 정말 있느냐? 있다. 그럼 어떻게 그걸 증명할 수 있느냐. 내가 증명해 보이겠다 해가지고 팠어. 파니까 금방 나와. 그래서 그 가난한 집에서 진금을 한 번 얻은 다음에는, 눈으로 보고 뭘 구할 것도 없고, 귀로 듣고 구할 것도 없고, 손으로 구할 것도 없고, 그 진금 하나만 가지고도 뭐 수억 만 년을 쓰고도 남는다 이런 비유예요. 이 눈코귀, 안이비설신의가 저 색성향미촉법을 대할 때, 좋다 나쁘다, 멀다 가깝다 계속 구하는데, 구해도 구해도 만족하질 않아요. 사람이라는 요 근본을 아는 게 굉장히 필요해요. 가져도 가져도 만족하지 못하는 게 사람이고요. 얻어도 얻어도 만족하지 못하는 게 사람이에요. 내가 너한테 얼마나 줬는데 그런 소리를 하냐. 그건 사람을 모르고 하는 소리여. 받으면 받을수록 더 받으려고 하는 게 사람이요. 그러니까 제대로 살려면 아예 안 줘야 돼. 처음부터. 그냥 왜냐하면 줘도 불만이니까, 안 줘도 불만이 있고, 그러니까 뭐 부모가 자식한테 좀 잘해주면 자식이 행복할 것 같죠. 절대 아니에요. 잘해줄수록 원망이 더 많아. 왜 이것밖에 안 해주느냐 그러고. 그게 인간이에요. 그러면 인간은 자기 스스로 좋은 체험을 하는 것이 가장 좋은 거예요. 누구한테 받으면 계속 더 받으려고 그래요. 자기 스스로 좋은 체험을 한 거는 그건 억만 재산보다 낫고 억만 상속보다 나아요. 자기 체험은 안 없어져요. 어디를 가든지 겁이 안 나, 좋은 체험을 하면. 그러니까 100일 기도를 하고 천일기도를 하고 다 그렇게 되면, 기도하는 그 순간에는 몸이 그게 부처님이거든요. 기도하는 순간에는 몸이 나쁜 짓 전혀 안 하고, 그냥 서든지 앉았든지 한 자리로 가잖아. 이게 부처님이지 완전히. 또 눈으로 경보고 눈으로 부처님 보고 입으로 부처님 이름 외우고 생각으로 부처님 생각하고 그 기도하는 순간에는 신구의 삼업이 전부 부처님이요. 그렇게 해서 하루하루 또 100일이 지나고, 천일이 지나면, 그보다 더 좋은 체험은 없죠. 그렇게 좋은 체험을 하면 그것이 어떤 경우가 와도 두려움이 없어요. 그런데 그런 체험이 없으면 늘 받아서 하려고 그러고, 얻어서 하려고 그러고, 주워서 하려고 그러니까 두려움이 많아. 그래서 부모가 뭘 많이 주면 아이들에게 겁을 많이 내게 한다. 근데 지가 체험을 해서 잘 살면 겁나는 거 하나도 없어요. 그 어릴 때부터 먹을 게 없어가지고, 주는 대로 먹고 산 사람이 60년대까지는 많았거든요. 나 뭐 먹을래. 어림도 없어요. 어떻게 주문해서 먹어요? 풀뿌리 먹고, 나무 껍데기 먹고 하는 판에. 그러니까 뭐든지 주면 좋은 거라. 그냥 주는 대로 먹어. 그런 경험을 한 사람들은요. 뭐가 와도 겁나는 거 하나도 없어요. 어릴 때 주는 대로 먹었기 때문에. 뭘 먹어도 몸에 좋다는 거 알거든요. 안 먹는 것보다 낫다는 거. 그냥 먹는 거 해탈했어. 그냥. 그리고 몸이 좀 고생한 사람은 어디 가도 겁나질 않아요. 모기가 물어도 얼마든지 잘 수 있고. 참 이거는 나도 경험해서 아는 거예요. 그냥 책 보고 아는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 성불을 한다는 거는 몸 성불, 말 성불, 생각 성불, 신구의 삼업이 같이 성불하는 거예요. 인간의 몸이라는 게 아주 영리하거든요. 몸이 먼저 알아요. 좋은지 나쁜지. 눈으로 볼 때는 저 사람이 좋을지 나쁠지 잘 판단이 안 서는데, 몸이 딱 느끼면 바로 알아. 그거 틀림없어요. 그만큼 이 몸이 아주 대단한 거예요. 그러니까 이 몸 체험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몸 체험. 어느 골짜기 가면 그 골짜기 다 안 들어가 봐도 입구에서 몸이 벌써 알아요. “여기 쎄하다.” 틀림없이 가면 안 좋아요. “아 여기 어디 느낌이 좋다.” 그럼 가면 틀림없이 좋아요. 그러니까 깊은 경지에 들어가려면은 이 몸의 체험이 깊어져야 된다, 이거죠. ③兒子作宰相 身爲國夫人 未足爲貴 糞掃堆頭 收得無價之寶 아자작재상 신위국부인 미족위귀 분소퇴두 수득무가지보 百劫千生 受用不盡 方始爲眞貴耳(大慧書狀 答秦國太 夫人文) 백겁천생 수용부진 방시위진귀이(대혜서장 답진국태 부인문) 그리고 강당에서 늘 가르치는 서장이라는 책이 있는데, 서장은 편지라는 거예요. 대혜 선사가 여러 사람에게 한 편지가 그게 서장인데, 거기에 이제 진국 태부인이라는 분이 있는데, 태부인이라는 건 지위가 아주 높다, 자식의 지위가 재상이다, 그래서 그 어머니를 태부인이라고 그러는데, 이 태부인이 경을 계속 읽다가 자기 불성을 봤어. 견성을 했어요. 이 눈으로 물질을 본 게 아니라 눈으로 자기 불성을 보았다. 그걸 견성이라 그래요. 견색은 맨날 하잖아요. 색을 본다. 이거 근데 자기 눈으로 자기 불성을 봐. 그래서 그걸 대혜 제자를 통해서 들었어. 근데 처음에는 대혜가 안 믿었어요. 그 진국 태부인이 불성을 보았는지 안 믿었는데, 그 제자가 자세히 설명을 해드리니까 믿게 됐거든. 그러고 이제 편지를 쓴 거예요. 편지에 무슨 말이 있냐면, 아자는 작재상(兒子作宰相)하고. 아자라는 건 그 아들을 말해요. 아이 아자, 아들 자자. 아들은 재상이 되고, 신위국부인(身爲國夫人)은 자기 자신이 국부인이 된 것은 미족위기(未足爲貴)나, 귀할 것이 못 되나, 분소퇴두(糞掃堆頭)에, 분소라는 거는 인분 분자, 쓸 소자인데, 여러 가지 깨끗하지 못한 거 온갖 거 쓸어 모아놓은 그 쓰레기 무더기를 말해요. 쓰레기 무더기. 그 쓰레기 무더기 퇴자. 머리 두자. 머리도 두자는 어조사. 쓰레기 무더기에서 수득무가지보(收得無價之寶)하야, 이게 값으로 계산할 수 없는 보배를 그 쓰레기 무더기 속에서 얻었다. 그게 견성이에요. 견성하지 못하고 그냥 죽으면 그냥 태우면 쓰레기 뿐이죠. 근데 거기서 견성을 하면 그 쓰레기 무더기에서 무가지보, 값으로 계산할 수 없는 보배를 얻은 거와 같다. 이게 또 아주 중요한 법문이라. 중요한 법문 할 때면 졸음이 약간 오거든요. 졸음이 약간 오면 이거 중요한 법문인 거예요. 졸음이 안 올 때는 그건 중요한 법문 아니에요. 그러니까 중요한 법문 하려면 계속 졸아야 돼요. 왜냐하면 졸음이 온다는 건 평소에 못 듣던 얘기니까, 처음에는 눈이 번쩍 뜨이다가 잘 이해가 안 되니까 이제 몸이 벌써 알고 졸아. 이건 내가 조는 게 아니야. 몸이 조는 거예요. 몸이 벌써 알아요. 몸이 살~ 좋단 말이에요. 몸이 안 졸면 중요한 법문 아니지. 지금 중요한 법문에서 잠시 멈추니까 조는 사람 한 사람도 없어요. 그게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쓰레기 더미에서 무가지보를 얻어서 백겁천생(百劫千生)토록, 백겁이 지나고 천생이 지나도록 수용부진(受用不盡)이라야, 그걸 쓰고 쓰고 써도 다 쓰지 못하고 남는 것이라야, 방시위진귀이(方始爲眞貴耳)니라. 바야흐로 비로소 참되게 귀한 것이 되나니라. 이런 법문을 편지로 써서 보냈어요. 그러니까 이 몸 가지고 이 눈으로 자기 불성을 보는 것은 쓰레기 무더기에서 값으로 계산할 수 없는 좋은 보배를 얻어가지고 백겁을 쓰고 천겁을 써도 다 쓰지 못하는 그런 걸 얻었을 때 그게 견성이다, 이런 법문이에요. 참 기가 막힌 법문이에요. 기가 막혀. ④凡諸佛 爲衆生 說佛德 意爲欲令衆生 自亦得彼果 故令修行 범제불 위중생 설불덕 의위욕령중생 자역득피과 고영수행 是故衆生 望自當來 所得之果德 爲欲得彼 不惜身命修行 시고중생 망자당래 소득지과덕 위욕득피 부석신명수행 不爲得 他佛果修行 是故 正令吾 發心修行佛 但吾當果(佛) 불위득 타불과수행 시고 정령오 발심수행불 단오당과(불) 已成佛 非他佛也(錐穴問答, 法界圖記錄卷下之二) 이성불 비타불야(추혈문답, 법계도기록권하지이) 그리고 지금부터 할 얘기는 제 자신도 잘 모르던 얘긴데, 자기가 지금 예경 공양 올리는 부처님이 자기 미래불이다. 딱 얘기가 그거예요. 내가 법당에서 예경하고 공양 올리면 그게 자기 미래불이다. 딱 이게 핵심이에요. 내가 법당에 가서 다 절을 올리잖아요. 그러면 지금 내가 절하고 있는 그 부처님이 미래의 자기불이다 이거예요. 이게 핵심이에요. 요런 믿음이 이게 굉장히 중요한데, 이거 다른 데는 잘 없어요. 경에 있다고 그러는데, 그 경을 봤을 리도 없고, 근데 의상 스님이 제자를 데리고 그 추동이라는 데 가서 화엄법문을 석 달 동안을 했다라고 그러는데, 그 기록이 있는데 전해지지 않는 것도 많은데, 고려 말에 그 의상 스님 제자들이 주석해놓은 책을 전부 모아서 책을 낸 게 법계도기총수록인데, 그 총수록 네 번째 권에 그 추동 법문 이거에 대해서 간략히 수록을 해놨어요. 그걸 보고 나도 처음 봤는데 이게 얼마나 중요한 법문인지 몰라요. 내가 어느 법당에 가서 지금 절을 떡 올리고 있으면 그것이 자기 미래의 자기 불이다. 내가 절하는 부처님보다 그게 미래의 자기 불인 거예요. 자기가 그렇게 되는 거예요. 이건 인과법이고, 부처님의 자비법이고 부처님의 영험법이거든. 근데 그게 뭐냐 하면 그런 거예요. 범제불 위중생(凡諸佛 爲衆生)하야, 모든 부처님이 중생을 위해서, 설불덕(說佛德)은, 부처님의 공덕을 자꾸 얘기하는 것은 그 이유가 뭐냐. 의위(意爲), 뜻으로 생각하기를, 욕령중생(欲令衆生)으로, 중생으로 하여금 자역득피과(自亦得彼果)라, 중생으로 하여금 스스로 그들도 그들의 성불을 얻기를 바래서 중생에게 부처님의 공덕을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중생이 성불하라고 부처님의 공덕을 이야기했지, 이미 부처된 당신에게 자기를 칭찬하라고 부처님의 공덕을 이야기한 게 아니라는 거에요. 이게 너무 당연한 거 아니에요. 그래서 고로 영수행(故令修行)하나니라. 그러니까 중생들이 스스로 성불하라고 수행을 하도록 하나니라. 그리고 그러므로 중생이 망(望) 당래(當來) 소득지과덕(所得之果德)하야, 자기가 당래에, 앞으로 자기 얻을 과덕을, 내가 어떤 부처님이 돼야 되겠다, 내가 성불해야 되겠다, 이런 결과의 공덕을 딱 생각하고 바라고, 위욕득피(爲欲得彼)하야, 그 자기가 생각하고 자기가 서원하는 그 부처님의 세계를 얻기 위해서 신명을 아끼지 않고 수행하면, 그것이 요게 굉장히 중요한데, 수행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서 했는데, 결과는 자기가 성불을 한 거예요. 가르쳐준 부처님 성불을 한 게 아니라 자기 성불을 한 거예요. 이게 이제 핵심이에요. 처음에 따라 할 때는 부처님을 따라 했는데, 이룬 거는 자기가 이뤘어. 모든 교육에 이게 똑같이 적용이 되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타불가(他佛果)를 얻는 것이 아니라, 타불가를 얻기 위해서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시고(是故)로 정령오 발심수행불(正令吾 發心修行佛)은, 나로 하여금 발심해서 수행하게 하는 분은, 단오당과불(但吾當果)이라.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를 위해서 발심수계 하게 하는 것은 석가모니불이 나의 당래불이다 이거예요. 나의 당래불. 그러니까 자기가 절했던 분만큼 자기가 성불을 해요. 이런 가르침이 잘 없어요. 이렇게 아주 대놓고 그냥 딱 그냥 알맹이 까보이는 가르침이 별로 없다고. 그래서 이성불(已成佛)은 이미 부처를 이룬 분은 비타불(非他佛也)이다. 다른 부처님이 아니라 내가 성불할 나의 미래불이다. 며칠 전에 가까운 산에 갔는데 거기가 유명한 옛날 무슨 누각터고 그런데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였지. 그런데 어느 분들이 와서 그 지도자의 가르침에 따라서 체조를 열심히 배우더라고요. 근데 지금 배울 때는 가르치는 대로 배우니까 그 가르치는 사람을 위해서 하는 것 같지. 근데 배우고 배우고 나면 전부 그게 나를 위해서 한 거예요. 배울 때는 다른 사람을 따라 했는데 이룬 건 내가 이루었어. 그 가르친 사람을 이룬 게 아니에요. 이거 이제 스승들이 하는 얘기인데 “내가 다 너 잘 되라고 한다.” 그런데 근데 그 말도 들으면 안 돼요. 사람이 이 몸에 집착하는 한, 다 저 좋게 가르쳐요. 이 몸에 집착이 없는 부처님은 그게 되는데. 몸에 집착이 있으면요, 부모는 부모 좋게 자식을 가르쳐. 이게 몸의 한계예요. 자식은 또 자식 좋게 부모에게 요구를 해. 그러니까 자식 하자는 대로 하면 그 부모 망해요. 절대 그러면 안 돼요. 왜 그러냐면 근본적으로 몸이 숨을 쉬고 있는 한, 인간의 생각은 몸을 위해서 생각하게 돼 있어요. 부모도 마찬가지요. 몸이 있는 한 자식들을 뭐라고 뭐라고 할 때 자기 좋게 하라고 가르칠 수밖에 없이 돼 있어요. 생겨먹기를. 절대 그러면 안 돼요. 부모한테 속아서도 안 되고 자식한테 속아서도 안 돼요. 스님들도 마찬가지여. 은사 스님도 성불하기 전에는 상좌들을 전부 자기 좋게 가르친다고. 그러니까 은사 이제 말 듣고 했다가는 잘못될 수가 있어요. 그래서 나는 아예 안 가르치고 “너,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 처음부터 그냥 미련을 딱 끊으니까 그렇게 편하더라고. 그냥 오든지 말든지. 근데 그냥은 안 오고 꼭 뭘 배우러 와 참. 그것도 기분 나쁘더라고 참. 와서 뭘 꼭 배우려고 해요. 그러니까 저 좋게 하는 거 아니고 다 그게 좋다 이거예요. 근데 배우면 처음에는 내가 가르치는 대로 배우는 것 같지. 그게 전부 저들 게 되는 거예요. 내 거 안 돼요. 석가모니불이나 비로자나불이나 다 중생을 위해서 가르쳤잖아요. 그럼 그대로 따로 하면 내가 비로자나불이 되고 내가 석가모니불이 되는 거지. 석가모니불 되라고 중생을 가르친 게 아니고, 비로자나불 되라고 중생을 가르치는 게 아니다 이거지. 그러니까 자기가 부처님께 예불을 드리면 그 예불 드린 부처님과 같이 미래에 자기가 성불한다. 요 얘기요. 마치겠습니다.
-
[국행수륙재] 10월 6일 국행수륙재 5재 법문
본각스님 2024-10-06
오늘 오재, 국행수륙대재 5재를 봉행하시는 거룩한 자리에 제가 법사로서 초대를 받았습니다. 먼저 찬탄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아침 일찍 삼각산 진관사 도량에 들어오니, 날씨도 참 오묘합니다. 좋아요. 해가 뜨거나 비가 오거나 둘 중의 하난데, 오늘은 참 오묘하다. 또 그윽하다,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천년 고찰 좋은 도량에 우리 회주스님 이하 모든 불자님들께서, 오늘은 각 사찰에서 진관사 불자님뿐만 아니라 많이 모이셨습니다. 또 그 가운데 꽃처럼 피어 계시는 우리 어장스님 이하 제자분들의 그 화음, 범음은 천상의 소리라고 합니다. 범천이죠. 오늘따라 더욱더 ‘아, 정말 이것이 천상의 소리로구나.’ 그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어장 스님 이하 모든 스님들께서, 회주스님, 주지스님 이하 이렇게 애를 쓰시는구나, 거기에 불자님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이 도량을 지켜주시는구나, 천년을 이어온 국행수륙대재를 이렇게 봉행하고 계시는구나. 여기서 기도를 하면 소원 성취 못 할 게 무엇이 있을까.’ 그런 마음이 들었어요. 이 법사도 크게 소원 성취하고 싶은 게 요즘 있답니다. 그래서 지극히 기도를 했어요. 여기 계시는 모든 분들도 우리가 소원이 성취돼야 행복하거든요. 오늘 행복하도록 함께 기도해 주십시오. 그래서 먼저 전통을 이어가고 현대를 살아간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데, 우리 진관사는 이렇게 이어가고 계시는구나. 그리고 제자 스님들이 다 크셔서 이런 말이 실례가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참 화음을 이루고 계시는구나, 범천의 소리이구나. 또 한 가지 더 말씀을 붙이면 조금 전에 염불하실 때 저희는 그 염불 뜻을 아니까, 불자님들도 계속 법요집이나 이런 국행수륙대재에 오셔서 자꾸 공부를 하시면 저처럼 잘 알아지십니다. 잘 아는 것 같으죠. 네. 그래서 하나 알고, 둘 알고, 셋 알고, 다 알아지시는 거예요. 그래서 어장스님, 우리 바라지 스님이 하시는 그 말씀이, 그 중에 무차대회 그랬어요. 차별이 없는 대회예요. 누구나 올 수 있는. 불교는 차별이 없습니다. 그것을 다시 긍정적으로 하면 평등대회, 무차평등대회, 들으셨죠? 이 부처님 도량에는 차별받는 사람도 없고, 모두가 평등한 이 법회에, 오늘은 큰 스님들, 비구 큰 스님들이 다 안 오셨죠? 우리 다행히 거사님들이 그 자리를 지켜주시는데, 회주스님도 비구니, 주지스님도 비구니, 어장스님도 비구니, 법사스님도 비구니, 함께하신 모든 스님도 비구니. 부처님께서 부처님 생존 시에 대애도 마하파사파제 비구니 어머니를 비구니로 받으셔서, 그 역사가 3천 년에 이릅니다. 여성의 출가는 인도에서 생각도 못 했던 일이에요. 그 남존여비, 조선시대보다도 더한, 지금도 인도는 그렇습니다. 거기에서 오직 불교만이, 여성의 출가는 여성에게 대자유를 허락한 거예요. 그래서 그 비구니 게송에 보면은 “나는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났다. 모든 억압으로 벗어났다.” 별별 비구니에 그 소해가 다 담겨 있는 것이 비구니게, 비구니 테리가타, 비구니들의 노래가 지금도 책으로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평등하게 남성이 계시고, 여성이 있고. 네. 오늘 모두 이렇게 찬탄해서 참 좋은 국행수륙대재다, 이렇게 말씀을 올리고, 모두가 평등하게 차별받지 않는, 오늘은 비구니들의, 정말 우리 어장스님이 국보십니다. 아마 우리 한국불교 1,700년에 비구니가 어장이 돼서 이 법회를 인도하시는 건 여기 진관사뿐이에요. 그분이 한 분이시니까. 그래서 너무 오늘은 더 비구니의 한 사람으로서, 부처님께서 허락하신 양성평등을 석가모니는 당시에 허락하셨어요. 그래서 그리스에서 이제 인도의 역사를 보면은 정말 불교는 대단하다. 여성의 평등을 출가로서 허락했다. 이런 게 이제 그리스의 기록에 적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정말로 국행수륙대재 진관사는 남녀가 차별이 없고, 노소가 차별이 없고, 빈부가 차별이 없는 평등 무차대회로구나 이렇게 찬탄해 올립니다. 오늘 주지스님께서 회주스님과 의논하셨겠지만, 와서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주제를 정해주셨어요. 전 이렇게 엄중한 주제를 받고 법사로 와보기도 처음입니다. 그래서 접때 제가 그랬어요. “젊은 엄마, 아빠가 없으면 나 그날 법문 안 하고 올 거야.” 그래서 아까부터 점검을 했어요. 근데 들어오는데도 젊은 엄마, 아빠가 -여기도 많이 젊으시죠?- 와 계시더라고요. 아기도 와 있고. 그래서 법문하고 가야 되겠다. 또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들께서 잘 기억하셨다가 젊은 엄마, 아빠한테 전해주세요. 그러시면 되겠죠. 거기에 이제 더 어려운 게 <신묘한>이 들어가 있어요. 신묘하다, 그러한 그 덕담을 오늘 이 국행수륙대재에 오신 모든 분들에게 말씀드려라. 그렇게 이제 명령이 내려지셨어요. 그래서 며칠 전부터 우리 삶 속에 무엇이 신묘할까. 무엇이 신묘할까. 천수경을 읽으시면요. <우리 몸은 광명장이고, 우리 마음은 신통장>이라고 나와요. 이제 그렇게 사셔야 돼요. 모습이 다 여기 계신 분들이 광명장이세요. 장은 갈무리하고 있다 그런 뜻이죠. 막 얼굴 찡그리면 광명 아니죠? 좀 속상한 일이 있으셔도 천수경을 읽을 때는 내 얼굴은 광명이다 그러시면, 누구에게도 빛을 나눌 수 있고, 누구에게도 행복을 나눌 수 있는. 오늘 행복하신 거 맞죠? 근데 그 얼굴과 몸이 광명장이세요. 근데 얼굴만 그렇게 잘 예쁘고 광명이면, 속이 텅 비면 큰일이잖아요. 속은 신통장이다. 오묘한 기운을 마음속에 갖고 계시는 게 이게 신통장이에요. 그래서 이 마음 하나로 우리 화엄경에 그렇잖아요. 일체유심조라. 마음 하나로 온 우주 법계가 다 만들어진다. 그래서 불교만큼 이 마음 마음 마음 이 오묘한 마음을 어떻게 할 것이냐. 오늘 아주 참 저도 신묘하게 말씀을 드리려고 이렇게 노력을 하지만, 들으시는 여러분들께서도 신묘하게 받아주셔야 돼요. 아시겠죠? 그걸 축착합착(築着蛤着)이라 그래요. 소리가 딱 나도록 서로 마음이 맞아야 돼요. 그래서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만, 신묘하게 부탁을 드립니다. 이제 젊은 층을, 젊은 층이에요. 그리고 이제 그 엄마, 아빠의 세대를 향해서 한 말씀 주십시오. 이 세대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이 불교는 삼세인과를 설해요. 삼세인과 많이 들으셔서, 이 수륙대재 몇 년 다니시면 이제 다 알아들으시고, 다 도통하신 그런 불자님들이 계실 거다, 그렇게 믿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가 삼세예요. 불교는 현재가 굉장히 중요해서, 현재에, 다 모든 기운과 정성과 마음을 다 현재에 머무르고, 과거를 보고 미래를 보는 종교가 삼세인과를 보는 종교예요. 지나온 거 보셔야 되잖아요. 가끔씩. 나 어제 뭐 했지? 또 내일 가서 뭐 할 건가? 지금 여기 있어 뭘 배워갈 것인가. 이게 시간을 그래서 원융법계라고 그래요. 직선이 아니고. 시작이 있었고, 태초가 있었고, 종말이 있으면 그건 불교적이지 않아요. 불교는 시간이라는 건 끝없이 이어져 가는, 무구한 그 긴 세월을 지금도 이어져 가는 그것을 원륭법계라고 합니다. 그리고 공간도 마찬가지. 지금 저희는 찬탄해 올린 이 거룩한 진관사에 지금 다 머무르고 있어요. 그렇지만 내가 가면 동서남북 사방팔방 시방으로 내가 오고갑니다. 그래서 삼세시방이에요. 향하면은 동쪽으로 향하고, 서쪽으로 향하고, 그리고 사이사이, 위로 갔다가 아래로 갔다, 엘리베이터 타시면 왔다 갔다 하시잖아요. 그래서 공간도 시간도 한 점에 머무르지 않고, 한 점을 시작을 해서 온 시간 공간을. 그래서 이제 젊은 아빠, 엄마를 제가 상대로 합니다만, 그분조차도 삼세인과를 우리가 알아야 된다 이 말씀이에요. 삼세. 아기가 있고 젊은 아빠, 엄마, 할머니, 할아버지 그것만도 삼세예요. 그래서 과거, 현재, 미래가. 그래서 저의 오늘 법문은 삼세 인과를 근본으로 해서, 아기와 젊은 엄마 아빠와 할머니, 할아버지, 최소한 조상님까지 올라가면 뭐 끝없이 이어지죠. 불교에서 조상을 소중히 여기고 부모의 효도를 말씀하시는 것은 바로 나의 생명의 근거가 부모님께 있고, 조상에게 올라가 그것이 이어져서 미래에 우리 아이들에게까지 쭉 가요. 그래서 젊은 엄마, 아빠들은 바쁘기도 하고, 세상의 경쟁 속에서 끝없이 어렵게 살아가시니까, 대강은 그 젊은 엄마, 아빠의 부모님인 할머니 할아버지가 거의 다 해주세요. 특히 재밌는 게 “기도도 내가 해주마”, 그거 해주고, “보시도 내가 해주마.” 그래서 요즘 저는 할머니, 할아버지 세대도 이제 많이 연세 들어가니까. 그전에 제가 어느 비구니 수행관 거기에 있는데, 부처님 오신 날, 젊은 청년이 자전거에다, 그날이 휴일인데도, 자기는 출근을 해야 된대요. 뭔 자루를 하나 싣고 왔어요. “그래서 그게 뭡니까?” 그랬더니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4월 초파일이 되면 꼭 스님께 소금을 갖다 공양해라. 옛날엔 소금이 귀했습니다. 산중 절은 참 귀했거든요. 그래서 이 청년이 출근하면서 자전거에다가 소금자루를 하나 실어 가지고 그냥 절 찾다가 지나가는 길에 절이 있어서 들렀습니다. 전 그걸 지금도 못 잊어요. 못 잊으면서 이제 나이 많이 들었겠죠. 한 30년 전 이야기니까. “잘 살아라, 잘 살아라.” 이름도 성도 몰라요. 그냥 소금자루 갖다 내려놓고, 그래서 부모님이 유언을 해주시고, 그 자손이 이렇게 지키면 그 집이 부자로, 저 이름도 모르고 이제 얼굴도 다 잊어버렸는데, 지금도 4월 초파일 되면 소금 자루 청년, 그땐 ‘청년 부자 되라’ 제가 이렇게 합장을 합니다. 그러니까는 우리가 그 현재 잘하는 것도 좋지만, 좋은 것을 유언처럼 남기셔서 우리 불교가 정말 3대에 이어지고, 10대에 이어지는 그러한 것이 참 신묘합니다. 그래 이제 첫째 우리 젊은 분들 밖에도 계시고, 또 잘 들어주시면 좋겠는데, 한 10여 년 전이죠. 벌써 20년 전에, 생명이라고 하는 건 어떻게 탄생하나. 그래서 막 창조설도 있고, 불교의 인연 연기설도 있고, 그러다 복제 돌리, 그냥 체세포 하나 있으면 그냥 생명이 탄생해요. 그래서 굉장히 불교는 환희로웠어요. 우리가 조건을 만들어주면 생명도 만들어지는구나. 이거는 어떤 한 절대자가 창조가 아니라 모든 노력을 하면 어디에서든지, 그래서 이제 굉장히 그런 일이 있는데, 창조든, 인연 연기든, 복제든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젊은 분들께는 만남이 중요함을 오늘 말씀드리고 싶어요. 정말 이 많은 사람 중에 우리가 부부로서 만났구나, 그 인연 연기예요. 다 공감하시죠? 만난 거예요? 어떻게들 만나셨어요? 만나신 거예요. 박수를 쳐드려야 해요. 네. 저도 이게 진관사가 여기 “은평구에서 진관사는 보석 같은 절이다.” 그러시더라. 정말 보석도 다이아몬드 그 이상, 여의주 같은 절이라고. 저, 여의주 아시죠? 소원을 빌면 다 뭐든지 되는 오늘 우리 너무 행복한 거예요. 그래서 여의주 같은 그러한 절인데, 거기에 와서 우리가 이제 이 중요한 법문을 더 배우는 것은 정말 그 만남. 오늘 다 만나셨어요? 저도 요 가까이 있어요. 한 30분이면 와서. 이웃을 저는 너무 잘 둔 거예요. 이렇게 잘 둘 수가. 우리 주지스님이 뭐든지 도와주셔요. 뭐든지. 그냥 외국 손님이 또 언제 오나, 내가 일 못해 미안하다. 우리 회주스님이 유명해서 저 분을 만나러 오고 싶다는데, 왜 나한테 청을 넣습니까? 내가 좀 센 줄 아나 봐. 우리 회주스님한테. 그래서 내가 또 주지스님한테 말씀드려, 주지스님한테 국궁 재배하고 했더니 “그럼 해주겠다.” 이렇게 이제 이웃이 여의주 같은 이 진관사가. 그런 걸, 이제 이 만남이에요. 이 만남이 저 사람 잘못 만났다, 아니에요. 어떠한 만남도, 우리 불자들은 그 순간부터 부부로 만났든, 친구로 누구를 만났든, 그 만남을 굉장히 감사하면 돼요. 남 탓하거든요. 우리 불교에는 남 탓이 없어요. 그냥 내가 좋은 사람이 되고 상대방을 향해서 헌신하면은 다 좋아져요. 그래서 오늘 부부가 젊은 부부든 연세 든 부부든, 조금 서로 마음이 삐딱하면 여기 계신 분이 먼저 가서 손을 잡고 “우리가 만났군요.” 이러시면 되겠죠. 그리고 지금부터 인생이 100년, 요즘 100년, 내가 100년도 못 사는데 그랬더니, 종로구청장님이 “아닙니다. 스님 100세 시대입니다. 말씀 고치셔야 됩니다.” 법문하다가도 말씀 고치려는 사람이 다 있구나. 여러 가지를 당하고 다닙니다. 그래서 이제 하여튼 100세 시대래요. 그래봤자 100세를 살아본들 우리가 이 100년을 사는 중에 정말 가까이 있는 사람, 만난 사람을 부처님이라 생각하고 존중 예경해야 되겠다. 오늘부터 이렇게 해보세요. 그럼 이제 다 행복해져요. 그래서 첫째 젊은 엄마, 아빠한테 만남의 소중함을 꼭 서로 이야기해 주십사. 그것은 바로 부처님이 말씀하신 인연 연기다. 이건 뭐 이래도 저래도 다 모든 것이 관계 속에 이어져서 우리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구나. 그렇게 만남의 소중함을 먼저 말씀하시고. 그런 가운데 살다 보면 저 아기 엄마 아빠예요. 엄마, 아빠, 저희들이 잘 모릅니다만 모르는 주제를 주셔서 더 이제 어렵긴 한데, 절에 있으니까 젊은 엄마, 아빠를 많이 만나요. 지금도 이제 제가 이름을 지어준, 경빈이 엄마라고 지금도 기억해요. 커리어 우먼으로서 막 활동하다가 좋은 사람하고 결혼을 딱 했는데 아이가 태어난 거예요. 경빈이가 태어나서 이제 저한테 오지도 않아요. 요즘. 그러니까 마음대로 말해도 돼요. 바빠서 안 오는 거 이해해 주면 돼요. 근데 그 시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인터넷을 찾아서 또 시어머니 49재 지내러 왔어요. 그래 잘 해드렸어. 또 안 와. 그래서 괜찮은데, 무슨 말씀을 드리려고 하냐 하면은, 그렇게 능력 있는 여성이 갑자기 아기를 낳으니까 발이 묶인 거예요. 이거는 정말 아빠도 발이 묶이지만, 여자가 발이 묶인 건 이거는 경험해보지 않으면 모르시죠. 자기 직장생활 다 놓고, 어딜 가려 하면 우유병서부터 들고. 그래갖고 그냥 정신이 스트레스가 쌓이고 쌓이고 쌓였어요. 그러니까 시어머니가 고민하다, 이제 저한테 와서 “우리 며느리를 어떻게 해야 편안하게 하겠습니까?” 그래서 저도 방법이 없잖아요. 그래서 그 경민이 엄마 손을 이렇게 잡고 “이래서 엄마가 거룩하다. 이렇게 힘들어서.” 우리 법구경에 보면은요. “어머니가 있으면 세상에 제일 부자이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아버지가 있는 것은 세상에 제일 부자이다” 그렇게 했어요. 그러니까 부모가 계시면 우리는 세상에 제일 부자, 재벌이 부럽지 않은 거예요. 어머니, 아버지가 그만큼 하시기 때문에. 그래서 며느님 경빈이 엄마 손을 잡고, 그래서 엄마가 정말 살신성인이잖아요. 우리 논어의 살신성인처럼 내 몸이 다 부서져 갖고. 그래서 부모십중대은이 있는 거예요. 아버지는 거기서 묵묵히 묵묵히 그걸 지켜보고 어머니는 온 몸으로 그걸 다 해서, 인, 인이라고 하는 것은 유교의 최고의 가치인데, 저희 불교는 생명이에요. 어머니가 살신성생, 몸을 다 부숴가지고 생명을 탄생한다. 그리고 생명을 기르고 그 생명이 성공하도록 하는 거, 이게 부모의 자리에요. 그래서 그 부모가 계시면은 정말 부자인 거에요. 그래서 이제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재를 지내러 오시면 제가 이 말을 꼭 해요. “살신성생하신, 살신성인한, 인을 성취한, 생명을 성취한 그 부모님이 가셨다.” 그분이 계시면 정말 부자인데 지금 아주 탈탈 거지가 됐다 이 말이에요. 부모님이 가셔서 우리 거지가 된 거야. 그래서 49일 동안 부모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지극히 기도를 해서 공덕을 쌓는 거, 그 공덕이 공유가 되죠. 돌아간 분께도 공덕이 되고, 살아있는 자손에게도 공덕이 되고. 그래서 이 불교의 정신세계가 그렇게 사는 거예요. 지금 세상이 다 바뀌고 막 정신을 못 차리게 변화됩니다. 그래서 이 변화무쌍한 세상 속에, 진관사는 천년, 3천년을 지켜가고, 저희 역시 그 가치를 지켜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자님들께서는 이런 국행수륙대재에 와서 불교가 소중히 하는 거, 세상이 다 바뀌어도 바뀌지 않는 그 가치가 생명이고, 우리의 삶인 거예요. 그래서 부모가 생명의 근본이에요. 우리 젊은 아빠, 엄마 잘 들어주세요. 젊은 엄마, 아빠의 엄마, 아빠도 지금 스님이 말씀드리는 것처럼 살신성생하신 분이다. 자기를 다 희생해서. 그래서 지금 뭐 옛날처럼 효도해라 이게 아니에요. 화엄경전에 지은보은(知恩報恩)하라는 말씀이 은혜를 알고 은혜를 보답하라. 이 말씀이 경전을 읽으면은 정말 좋은 말씀이 많아요. 은혜를 알지 못하는데 우리가 은혜를 어떻게 갚을 거예요? 그래서 보면은 그 대성심지관경 참 거룩한 경전인데요. 화엄경에서는 지은보은해라, 모든 은혜를 알고 은혜를 보답해라. 대성본생심지관경에서는 세 가지 은혜를 들어요. 첫째 아버지는 자은(慈恩)이에요. 자비 자자. 오늘 아버지들도 많이 와 계신데, 아무 말 없이 감싸고 울타리셔요. 그러시죠. 안 그러신 분은 오늘 그러더라 좀 그렇게 대답을 하시면 돼요. 똑똑히 듣고 전하시면 돼요. 그리고 막 이렇게 손 이러면(손가락으로 가르키면서)서 하시면 안 돼요. 합장하고. 우리가 나 자신을 낮추면은 시빗거리가 없어져요. 제가 가까운 절에 있는데 한 9년을 공부한다고 외국에 나가 있었고, 26년을 스님들 교육시킨다고 나가 있었고, 비구니 회장한다고 4년을 나가 있었고, 그 30~40년을 아무 역할도 못했어요. 그리고 이제 본사에 70이 넘어서 이제 돌아온 거예요. 제가 뭘 못하겠어요. 젊은 스님들이 힘들어하는 거 내가 다 하려고 작심을 했어요. 그냥 제일 저기하는 게 강아지 밥 주는 것보다 거기에 버리고 가는 강아지. “내가 할게.” 또 안 떠나고 돌아온 고양이, “내가 밥 줄게” 뭘 못하겠어요. 그러니까 저가 그러고 있으니까 우리 연세 드신 불자님도 다리가 움직여지면, 젊은 사람들 바쁘거든요, “왜 니가 안하고.” 따지지 마세요. “내가 할게, 내가 할게” 한번 해보세요. 내가 할게. 내가 하겠습니다. 좋은 일은 다 내가 하겠습니다. 그리고 꾹 움켜쥐고 있으면 욕심쟁이예요. 공덕은 돌려드리는 회향이에요. 내가 지은 모든 공덕을 다 돌려드리면 이게 부처님의 세계에요.자꾸 이쪽에 많이 앉아 계셔서 이쪽을 쳐다봐서 죄송해요. 이게 차별이야. 그러다가 이쪽도 뵈야 된다 하면 여기보다 여기가 많아. 밖에는 아직 잘 안 보이니까 창문 너머로 문 틈으로 밖에 계신 분들도 뵙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를 낮추면서 아버지는 자은이라 하더라. 자은은 자기 자자 아시죠? 그냥 계시면 훈훈한 거예요. 말씀 안 해도. 그러면 잘 받들어드려. 우리가 서로를 존중하면 싸울 일도 없고, 시비도 없고. 그래 부처님께서 탐진치 삼독을 내려놓으면 일체 시비가 끊어진다, 그 말씀이에요. 그다음에 어머니는 잘 기억하세요. 어머니는 슬플 비자, 비은(悲恩)이에요. 슬픈 거예요. 어머니는. 몸도 아프고 배도 아프고. 다 경험하셨잖아요. 어머니들. 그리고 누가 아이가 잘못되면 같이 돌아가세요. 같이. 아버지는 그 뒤치다꺼리 하느라 정신없으시고. 그래서 첫째가 건강이셔요. 그래서 제가 군대 가는 아드님한테 “건강해서 와라. 너희 부모님한테 너가 보물단지다. 건강해서 와라.” 우리 다른 욕심 없어요. 가족이 건강하게 잘 함께 밥을 먹으면 그것이 행복한 거예요. 그래서 어머니는 항상 애간장이 녹아서 비은이에요. 항상 슬픈. 아주 정말 대성본생심지관경에 그랬어요. 그리고 또 하나의 은혜가 있어요. 그건 중생은(衆生恩)이에요. 뭇 생명의 은혜. 쌀 한 톨을 지어도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죠. 오늘 새벽 예불을 하는데 새카만 벌레가 다 이렇게 꼬부라져서 가사 자락에 있어요. 그래서 내가 이렇게 집어갖고 거기에 탁자 위에다 놓고 죽었나 살았나 봤더니 천수 치고 나니까 쫙 오그라들었던 게 쫙 펴졌어요. 살았구나. 그래 살아있으면 얘를 어떻게 해야 되나 그래서 얼른 축하 난화분이 있길래 난화분 위에다 올려줬어요. 그랬더니 우리 젊은 스님 뭐 했냐고 설명했죠. 가사 자락에 애벌레, 애벌레가 꼬부려져 있길래 죽었나 봤더니 한참 있다가 쫙 퍼져서 살아 있구나를 확인하고 난화분에 올려줬다. 이것이 생명이다. 우리 불자님들은 어떠한 생명도 손상시키지 않으려고 노력하는데. 그렇게 노력을 해도 내가 살다 보면 생명이 손상이 돼요. 그러시죠? 농사를 지어도 그렇고 남을 이겨야 되고, 남보다 잘나야 되고, 모든 게 이 세상은 생명을 손상하게 되요. 근데 그 생명을 살리는 분이 우리 또 부모님이신 거. 그래서 욕심이 과하면은, 내 아이, 내 아이 하다 보면 다른 생명을 손해 끼칠 수가 있어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항상 탐진치 삼독, 어리석음, 성냄, 탐욕을 내려놓고, 모든 생명, 나의 생명과 내 가족의 생명, 모든 생명, 그것이 담겨 있는 것이 중생의 은혜다. 이 세상에 은혜롭지 않은 건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그거 하나 깨치고 가시면 좋겠어요. 오늘 물도 내고 바람도 내고 구름도 내고 산천초목이 은혜 아닌 것이 어디 있겠느냐. 이거 우리가 그 자연을 다 망가뜨리고 잘 살아본다고. 그래서 반세기를 우리가 발전하고 개발하고 다 망가뜨리고. 다 풍요롭고 지금 대한민국 이 금수강산이 쓰레기 산더미가. 제가 얼마 전에 이제 요즘은 데이터로 나오니까 한 300개의 쓰레기 산더미, 이제 점점 더 많아졌어요. 그래서 국가도 그렇고 모두가 어떡하면 이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자연의, 그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살려면 우리가 1차로 각자의 욕심을 줄이는 거예요. 소박하게 살려고 노력하시는 거. 그게 잘 안 되지만 안 된다고 던져버리시면 안 돼요. 해보자. 굉장히 긍정적인, 해보자, 내가. 그래서 우리 젊은 엄마 아빠들은 굉장히 풍요로운 시대에 살고 계셔요. 지금 60대 넘으신 부모님들 전쟁 다 겪었고 다 아셔요. 새삼 법사가 뭐 이러시오 저러시 할 거 없어요. 오늘 주제가 젊은 분들을 향하니까 그분들은 다 풍요롭게 좋은 시대를 살아오셨기 때문에 무엇을 내가 갈무리해야 되고, 무엇을 절약해야 되고, 어떻게 검소해야 되고, 어떻게 남하고 대응할 때 지혜를 다 잘 모르셔요. 그래서 앞으로는 부처님 경전에 8만 대장경 경전에, 8만 대장경 경을 하루아침에 아시겠습니까? 오실 때마다 공부하시면 돼요. 진관사가 모범 사찰이잖아요. 멀고 먼, 그거는 금생만의 공부가 아니라 다음 생애로 이어지고 다음 생으로. 저는 이제 지금 원을 세워요. 다음 생애는 좀 더 말도 좀 잘하면 좋겠고, 키도 좀 더 크면 좋겠고, 또 그리고 좀 더 똑똑하면 좋겠고. 접때 우리 승가대 나오신 비구 교수님이 제가 막 고생도 아닌데 그렇게 보였던가 봐요. 절 보고 ”스님 같은 분이 저 산 중에 좋은 사찰을 가지셨으면 얼마나 멋있고 잘 계실 텐데 꼴이 말이 아닙니다.” 이런 말로 들렸어요. 그래서 내가 정색을 하면서 “나같이 잘 배운 사람이, 이만큼 누린 사람이 산중 좋은 절에 가 앉으면 내가 뭘 하겠느냐” 정말 불자님들 이렇게 오실 때, 또 진관사는 이렇게 오라고하니까 고마우시잖아요. 함부로 안 청하신대요. 근데 저도 뽑힌 것 같아요. 이렇게 가까이에 저기 여의주 같은 진관사가 있어서 이렇게 뽑아주시니까 달려올 수 있잖아요. 뭘 못하겠어요. 그래서 제가 정색을 하면서 “나는 여기가 좋다. 뭐든지 몇 백 년을 살 것도 아닌데 할 수 있는 데까지.” 그래서 오늘 우리 불자님들이 전부 그러한 마음으로 우리가 생명을 살리는. 최고의 가치가 불교는 생명이에요. 그래서 제일계가 불살생인 거 아시잖아요. 근데 오늘 그 벌레 아마 게는 아마 저기 이고득락 고통을 여의고 이 좋은 날 스님 가사 자락에 앉았다 능엄주 치는 거 다 듣고 그래 이제 갔으니까. 그러니까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생명이 크고 작은 걸 차별하시지 말아라 이 말이에요. 내가 얘를 무시하고 죽이고 이건 내 몫이고, 그것을 잘 살리고 보호하는 거 역시 내 몫이다. 그래서 불교는 공덕을 지어가시는 거예요. 그래서 아버지는 자은이고 어머니는 비은이고 모든 생명은 우리를 살리는 중생의 은혜다. 이 은혜. 이것을 화엄경에서는 지은보은해라. 모든 거에 은혜를 알고 그 은혜를 보답해라. 그래서 자손을 아기를 키우실 때 은혜를 갚는, 은혜를 아는 아이로 키우시면 그 부모는 성공하신 거예요. 1차가 부모의 은혜를 알으니, 부모를 속상하게 할 일이 없고 내 주위의 모든 은혜를 알게 키우니까 모두가 행복한 거예요. 그래서 이 세 가지 은혜를 꼭 기억해 주십사. 그리고 이제 마지막에 마지막 말씀이 기도하는 삶을 젊은 불자님들께 부탁하고 싶어요. 할머니, 할아버지가 기도도 대신 해주셨어. 너무 잘해주신 거야. 기도할 줄 몰라요. 젊은이들이 와서 어머니는 기도 부탁하면 젊은 부부가 카톡으로 대화를 하고 있어요. 그냥 다른 세상인 거예요. 어머니가 기도 부탁하는 동안에 자기네들은 놀고 있어요. 직접 봤어요. 그래서 오늘부터 몇백 년을 지켜주시지 못할 거니까 우리 젊은 엄마, 아빠는 항상 기도해라. 석가모니 부처님처럼 거룩한 성인이 안 계셔요. 불자님들이 그걸 먼저 아셔야 돼요. 그래서 제가 그러죠. 불교는 권력도 없고, 엊그제 우리 신도님이 돌아가셔서 여기 가까운 은평 카톨릭 거기 장례식장에 갔더니 대기업이더라고요. 정말 거기서 편리함도 있지만 얼마나 많은 그 재력을 쌓아갈까 그러면서 부럽다. 그래서 아주 당당하게 가서 이제 모시고 이제 왔는데요. 그래서 우리는 돈도 없어 권력도 없어 조직도 없어요. 이웃 종교의 그 조직이라 하는 건 무섭잖아요. 그래도 우리 진관사는 최모범 사찰이에요. 다 오시라 하면 오시는 것 같아. 벙거지도 다 쓰고 앉아 계세요. 아마 주지스님이 쓰시라고 명령해서 오늘 봉사자신 거. 이 정도로 잘 하시면 모범 사찰이에요. 이게 조직이에요. 저 있는 절에는 그래도 한 50명이 따라오셨어요. 50명이 스님 일로 오늘 일요법회로 따라오셨더라고. 그래갖고 아무리 진관사가 부자지만은 50명이나 가서 밥을 먹으면 너무 죄송한데, 그래서 아까 영전에 올리는데 금륜사 신도 공양비, 너무 적지만 너무 염치가 없잖아요. 하여튼 저희는 저희 절도 그렇고 여기도 그렇고 이제 조직을 우리가 진관사가 굉장히 모범 사찰이셔요. 딱 조직. 그래서 아무것도 없지만 불교는 1700년을 이어왔고 앞으로도 이어갈 것이다. 그건 뭐냐면 원력이에요. 이 국행수륙대재를 지켜가는 우리 스님들과 불자 원력이에요. 정말 아까 염불에 전 소름이 돋더라고요. 그 한문 한문 하나, 모든 슬픈 영가들, 인간을 도우기 위해서 희생된 모든 동물 가축에 이르기까지, 이름 없는 영가들, 떠도는 영가들. 대만에 가서 그 수륙재 하는 걸 들었더니 뭐가 나오냐 하면은요. 제가 그 원문은 외우지 못했는 저기 지금 기억이 없는데, 과거 급제하러 갔다가 가족들이 얼마나 큰소리치고 갔겠어요. 떨어졌어요. 집으로 못 가는 거예요. 그래서 산천을 떠도는 영가도 여기 와라, 그런 염불이 있더라고요. 우리는 그건 못 들었는데 대만 저기 불광산사에서 수륙재 하실 때 제가 갔더니 뜻이 그래. 과거 시험 보러 갔다가 떨어져서 집으로 못 가고 산천을 떠도는 외로운 영가도 수륙재에는 와라. 그래 무차대회예요. 그러니까 이 수륙대재 이걸 지켜간다는 것은, 내가 우리 여기 진관사에 어떻게 저걸 저렇게 해마다 하실까. 그래서 오늘 다 우리가 소원 성취하겠죠. 그 소원 성취하는 가운데 은혜를 아는 거 이것이 큰 공덕이다. 그리고 아이들을 은혜를 알게 보답해라. 지식은 쌓아가게 되어 있어요. 최고 학벌해봐도 별로 의미가 없어. 이제는. 자기 길을 정확하게 지혜롭게 걸어가고 그 걸어가는 중에 정말 소중함을 지켜가는 아이들. 제일계가 부모에 대한 소중함을, 가족에 대한 소중함, 그리고 나를 살려준 뭇생명에 대한 소중함 그게 자은 비은 중생은이에요. 그것을 지켜가는 그러한 사람으로 키워 그게 그냥 되느냐 기도하는 거예요. 저도 기도하고 우리 불자님 기도하고 젊은 세대가 기도하고. 그 부처님이 그렇게 가르치셨어요. 부처님이 나를 존중해라가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일체의 모든 것이 은혜 속에 있다. 그 은혜를 존중하고 그 가치에 감사드려라. 이게 기도예요.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원력이. 원력 다 있으시잖아요. 원할 원자 힘이에요. 저도 원력이 있고, 우리 스님들도 원력이 있고, 불자님들은 “아우 나는 가난해 난 되는 게 없어.” 절대 그런 말 하시면 안 돼. 나는 되게 해야지 나는 지금 가난하지만 부자로 향해야지. 그 원력을 가지시는 거에요. 그래 부처님이 내가 부족하다 하면 공덕을 지어라. 복을 지어라, 지으시면 돼. 지금 지으러 다 오신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해서 우리가 10년 20년 저는 앞으로 얼마나 살지 모르겠어요. 차례대로 죽자 그러면, 우리 회주스님하고 저하고 아마 회주스님이 나이가 더 많으시면 너무 죄송한 말이 돼버렸는데, 저희 절에 90 노인이 있으시고 팔십넷 노인이 있으신데 부탁이 차례대로 죽자 90노인 알았어요. 차례대로 죽을 테니까 걱정마세요. 여기 계신 분들 다 차례대로. 그건 또 일본의 일휴 선사, 유명한 근세 일휴 선사가 계신데, 아주 재밌는 행을 하시는 분인데 어느 경축하러 갔어요. 가 가지고서는 “경축 축하 글을 써주세요.” 그러니까 그분이 툭 해갖고 <조사 부사 손사> 조부가 죽고, 저기 아버지가 죽고, 손주가 죽고. 그래서 그거는 아니 스님 이 경축하는 일에게 왜 죽는 걸 써주시냐. 그럼 거꾸로 해줄까. 아닙니다. 아닙니다. 손주 먼저 죽으면 큰일이잖아요. 이 세상에 가장 행복한 것이 조사, 조부가 먼저 죽고, 부사, 부모 대가 죽고 손주는 알아서, 그걸 그게 제일 경축인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정신 바짝 차리면 감사하고 행복한 일이 너무 많이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딱 차례를 지켜서 언제 떠나더라도 내 할 일을 다 하고, 하심, 자기를 낮추고, 공덕을 짓고 내가 지은 것을 다 회향해서 은혜를 갚는. 그래서 저는 젊은 세대에게 지금까지는 부모님의 기도로 이만큼 살았으면, 오늘부터는 그대가 기도를 해라. 그리고 아이들에게도 기도하는 삶을 가르쳐라. 이게 제일 중요합니다. 여기까지 나도 앞으로 하겠지만 “이제 너가 기도해라, 보시도 너가 해라. 착한 일도 너가 하고, 아이들에게 은혜를 갚는 그러한 삶을 꼭 가르쳐라.” 하실 수 있죠. 그러면 우리가 그리고 이제 시간이 다 됐어요. 법화경 도량이셔요. 그리고 많은 큰스님이 오셔서 다 법화경을 설하셨는데, 법화경 방편품에 제법종본래(諸法從本來)로 상자적멸상(常自寂滅相)이라. 불자행도이(佛子行道已)하면 내세득작불(來世得作佛)이라. 이게 방편품 게송이에요. 몇 분이 하셨으니까 오늘 또 꼭 외우세요. 제법종본래. 요즘은 검색의 시대에요. 사유는 없어지고 검색만 나와 있다고 그랬는데 검색하고 사유하시면 돼요. 이 모든 현상이 원래원래 종본래 원래 원래 적멸 고요하다. 우리의 그 내면에 충실한 것이 적멸이에요. 열반의 경지예요. 남 탓하실 것도 부족하다고 아우성칠 것도 내가 갖고 있는 그대로 만족하고 감사하는 게 적멸의 세계예요. 이 모든 것은 원래 고요하다. 불자행도이, 우리 모두 불자시죠. 불자가 긍지를 가지셔야 돼요. 그 난리 치더니 된 게 뭐 있냐. 한쪽에서는 저 처절한 전쟁이 그냥 이어지고, 사람이 죽어가고, 아직도 가난한 사람은 가난하고, 부자는 부자고. 뭐가 됐느냐 이 말이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부처님이 돼야 되겠다. 나의 본 모습은 정말 고요하고 진리 그 자체로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그런 모든 은혜에 다 은혜가 부자라면 불자행도리 불자들이 이러한 위치를 매 순간 실천하며 내세득작불, 미래에 우리가 다 부처님 아니냐 이 말이에요. 우리 부처님 되려고 이러잖아요. 그렇게 살아야 부처님이 되지, 살지 않고 무슨 부처님 되길 바라냐 이 말이에요. 그래서 우리 진관사에 모이신 모든 분이 저희 스님들과 함께 잘 고요한 적멸의 세계에 충만하시고 모든 거에 감사하고, 모든 것을 기도하고, 그리고 우리가 부처님 되어지이다. 그런 마음 가져주십시오. 성불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