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법문

[신중기도] 2월 28일 음력2월 초하루 신중기도 입재 법문 2025-02-28

주제 : 義相祖師法性偈이야기

의상조사법성게 이야기

-- 一即一切多即一 · 約緣起陀羅尼理用 辨攝法分齊 --

-- 일즉일체다즉일 · 약연기다라니이용 변섭법분제 --

 

       안녕하십니까. 진관사 2월 초하루 법문입니다.

       오늘은 법성게 일즉일체다즉일, 그 게송이거든요. 일즉일체다즉일. 손바닥 딱 치는 거 생략하고 그냥 10번을 외우고 마치겠습니다. 시작.

 

일즉일체다즉일 일즉일체다즉일 일즉일체다즉일 일즉일체다즉일

일즉일체다즉일 일즉일체다즉일 일즉일체다즉일 일즉일체다즉일

일즉일체다즉일 일즉일체다즉일

 

이 법성게는요. 화엄경 80권 내용을 7() 30(), 7자씩 쓴 게송 서른 구를 만들어서 표현한 거거든요. 화엄경 80권을 730구 게송으로 표현한 건데요.

 

一乘圓敎 大華嚴經 一乘法界 圓融圓通

일승원교 대화엄경 일승법계 원융원통

無障無礙 相卽相成 聽聞半偈 成就最上

무장무애 상즉상성 청문반게 성취최상

 

 

       그럼 화엄경은 뭐냐. 부처님이 깨달은 세계, 깨달음으로 가는 세계가 아니라 깨달은 세계. 그 깨달은 세계를 불승(佛乘)이라고 해요. , 불은 부처님이라는 말이고, 승은 문이라는 뜻도 있고요. . 또 길이라는 뜻도 있고, 또 머문다라는 뜻도 있어요. 승자가. 그래서 부처님이 가는 길, 부처님이 오고 가는 문, 또 부처님이 머무는 세계, 그런 거를 어려운 말로 불승 그러거든요. 이제 불은 하나다 이래서, 불승을 일승(一乘) 그래요. 일승. 또 일자와 불자를 같이 표현해서 일불승 그렇게도 표현해요. 일불승. 그런데 불승이고 일승이거든요. 그 불승이고 일승인데, 그 부처님의 세계, 깨달은 분이 머무는 세계, 이걸 불주(佛住)라고 해요. 부처님이 머문다. 그러면 깨달은 분은 어디에 머물까. 서울특별시에 머물까, 아니면은 어느 다른 곳에 머물까. 이제 그런 걸 깨달은 분은 어떤가. 이게 이제 생각을 하게 되거든요. 그런데 법성게에서 여덟 번째 구절에 부처님이 머무는 곳은 일즉일체다즉일이다.

       그럼 일이라는 건 뭐냐. 하나가 곧 많은 것이고, 일체라는 거는 많다 소리거든요. 하나가 곧 많은 것이고, 다즉일, 많은 것이 곧 하나다, 여기에 머문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화엄경은 하나는 모든 것이 만들어내고, 모든 것은 하나가 만들어낸다. 하나에는 하나 자성이 없고, 자성이라는 거는 자기 체성(體性)이라는 말인데, 자기 체성, 하나에는 하나의 자기 체성이 없고, 많은 것은 많은 것의 자기 체성이 없다. 그러면 어떻게 되냐. 많은 것은 하나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하나는 많은 것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이거를 화엄 연기라고 해요. 화엄은 공덕 장엄의 연꽃인데, 공덕 장엄의 연꽃으로 이루어진 세계가 이 우주 법계인데, 이 우주 법계는 하나는 하나의 자기 체성이 없어요. 그럼 뭐냐. 여러 개가 하나를 만들어요. 또 여러 개는 여러 개의 자기 체성이 없어서 하나가 여러 개를 만들어요. 그래서 이제 이런 거를 법계 연기다. 법계가 인연으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하나가 모든 것이기 때문에 하나에 있어도 아무 불편이 없어요. 또 모든 것이 하나기 때문에, 모든 것도 모든 것에 있어도 아무 불편이 없어요. 그래서 그런 거를 무장무애(無障無礙)라고 그럽니다. 장애가 전혀 없다. 또 그런 거를 상즉상성(相卽相成)이라고 그래요. 상이라는 건 서로라는 말인데, 상즉이라는 건 뭐냐. 이것이 곧 저것을 만들고, 저것이 곧 이것을 만든다. 1 찰나가 아주 간단한 시간이죠, 무량한 겁을 만들고 무량한 겁이 1 찰나를 만든다. 그래서 이 모양만 보고 모양에 딱 얽매이면, 작은 건 작고 큰 건 크고 그런데, 작은 것은 큰 것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큰 것은 작은 것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이런 일즉일체다즉일, 이 속으로 딱 들어가면 그게 해인삼매인데, 하나라고 해도 모자라는 게 하나도 없어요. 또 여러 개라고 해도 남는 게 하나도 없어요. 이걸 원융원통(圓融圓通)이라 그래요. 끝없이 오고 가고 끝없이 통한다. 이래서 하나는 많은 것을 만들고, 많은 것은 하나를 만든다. 하나와 많은 것은 장애가 없다. 하나와 많은 것은 서로 이룬다. 하나는 많은 것을 이루고, 많은 것은 하나를 이룬다. 부처님은 여기에 사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사 다닐 필요도 없고요. 하나가 여러 곳이니까 이사 안 다녀요, 부처님은. 이사 안 다니면 좀 재미는 없나. 그러니까 뭐 부족해서 걱정할 필요도 없고요. 남아서 귀찮을 필요가 없어요. 남는 건 귀찮거든요. 또 부족하면 아주 걱정되잖아요. 그런 게 전혀 없어. 이런 거를 법계 해탈이라고 그래요. 법계 해탈. 모든 법 자체가 하나하나가 무장무애하고, 원융원통해서 남는 것도 없고 모자라는 것도 없다, 뭐 이런데.

 

(一卽一切多卽一)一句 德用自在門 謂此即()彼 彼即()

(일즉일체다즉일)일구 덕용자재문 위차즉()피 피즉()

無㝵無側 故云德用自在門 及位動門也

무애무측 고운덕용자재문 급위동문야

(法界圖記叢髓錄 卷上之一)(법계도기총수록 권상지일)

 

        이제 이런 거를, 의상 스님의 제자들은 이걸 그냥 얼마나 보고 연구를 하고 가르침을 줬는지 이루 말할 수가 없어요. 일즉일체다즉일이라는 것은 의상 스님의 제자들이 연구한 결과, 덕용자재(德用自在)라고 쓰세요. 일즉일체다즉일 이 덕용이 자재하다. 덕용이라고 하는 것은 뭐가 하나 이렇게 생기면 이것이 이거 가만히 있어도 영향을 줘요, 다른 데. 이거 스스로가 다른 데 영향을 주는 걸 덕용이라고 그래요. 덕용. 덕용이 자재한 것이 일즉일체라고 하는 구절이다, 이렇게 연구를 했어요. 그게 뭔 소리냐 하면은, 집을 짓는데 기둥이 하나 떡 이렇게 생기면 기둥이 저절로 주춧돌을 거기 오게 해요. 기둥은 가만히 있는데 그 기둥을 세우기 위한 주춧돌이 거기 생겨요. 그게 기둥의 덕용이에요, 주춧돌이 놓이게 하는 것이. 또 그 위에는 또 기둥 위에 또 나무가 얹어지잖아요. 그런데 기둥은 기둥일 뿐이에요. 근데 주춧돌 또 놓이게 하고 나무도 얹어지게 하고 이런 게 전부 덕용이라고요. 그래서 일즉일체다. 하나가 있으면 그 하나가 여러 곳에 무한한 그 공덕 작용을 일으킨다. 그래서 이걸 덕용자재문(德用自在門)이다, 이렇게 해석을 해 주고 있어요.

 

道身章云 問 西風波 非東風波 東風波 非西風波 但約二

도신장운 문 서풍파 비동풍파 동풍파 비서풍파 단약이

波之水體 不二義 得言即門 則約二波 不得即門 若爾 但約

파지수체 불이의 득언즉문 즉약이파 부득즉문 약이 단약

此事彼事 理體無二 得言即門 何得二事不除 論相即門耶答

차사피사 이체무이 득언즉문 하득이사부제 논상즉문야답

若放()二風 水無二波 旣無二波 以何即何乎 旣以此即彼

약방()이풍 수무이파 기무이파 이하즉하호 기이차즉피

故 可知不除二波 論相即耳 非約理體 論相即矣

고 가지부제이파 논상즉이 비약이체 논상즉의

 

 

       그리고 그다음에는 도신장(道身章)이라고 하는 곳에서 일즉일체를 어떻게 설명했냐 하면, 망망대해에, 그 넓고 넓은 넓은 바다에, 바람이 동쪽에서 슬 불어오면 그 바다가 동풍파(東風波)를 일으켜요. 동풍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파도를 일으키는 거예요. 또 서쪽에서 바람이 불어오면은 이걸 또 서쪽 물결을 일으키는데 이걸 서풍파(西風波)라고 그래요. 서풍파. 서쪽에서 바람이 실 불어오면은 그 바다의 물결이 서풍에서 불어오는 서풍의 물결을 일으킨다. 그럼 남쪽에서 오는 것도 마찬가지죠. 남풍은 남풍파를 일으키고, 또 북풍은 북풍파를 일으키는데, 그런데 이게 서쪽에서 불어오는 서풍의 파도나, 동쪽에서 불어오는 동쪽의 파도나, 남쪽에서 불어오는 파도나, 북쪽에서 불어오는 파도나 모두 한 물에서 일어나는 거라는 거예요. 한 물에서. 그래서 물은 하나인데 파도가 많다. 이것이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이다, 이렇게 설명을 했어요. 파도가 아무리 여러 곳에서 와서 여러 파도를 일으켜도 물은 하나다. 설명이 되나요? 나 이분들이 애만 썼지 별 도움은 안 될 것 같은데. 아무리 여러 바람에 의해서 여러 파도가 일어나도 물은 하나다. 그러니까 일이 곧 많은 것이고 많은 것이 곧 일이다. 뭐 이런 얘기를 하고요.

 

此中 此波之水 與彼波之水 水體是一故 波雖無盡 體言即

차중 차파지수 여피파지수 수체시일고 파수무진 체언즉

一者三乘義耳 若非此波 即無彼波 若非彼波 卽無此波 是中

일자삼승의이 약비차파 즉무피파 약비피파 즉무차파 시중

門 此波非自性故 在於彼波 彼波非自性故 在於此波 是即門

문 차파비자성고 재어피파 피파비자성고 재어차파 시즉문

者 一乘也

자 일승야

又古人云 中門 如燈光相入故 但諸燈用相入耳 即門 如

우고인운 중문 여등광상입고 단제등용상입이 즉문 여

波水相收故 波體水體無二 相即耳

파수상수고 파체수체무이 상즉이

(法界圖記叢髓錄卷一)(법계도기총수록권일)

 

 

       그다음에는 뭔 말을 하느냐. 차파지수와 여피파지수라(此波之水 與彼波之水). 수체가 시일고(水體是一故)로 또 이쪽 남쪽에 일으키는 파도의 물이나 북쪽에서 일으키는 파도의 물이 파도는 다르지만 물은 하나인 고로, 아무리 파도가 많이 일어나도 물은 하나다. 그래서 파파가 무진(波波無盡)이나, 물결 물결이 끝없이 많지만 또 체언즉(體言即)이라, 그 물에 본체를 말하면 하나다. 파도가 아무리 많아도 파도의 본체는 물인데, 그 물은 하나다. 그러니까 이 세상은 많은 것 같지만, 하나에 다 있다는 거예요. 파도가 아무리 많은 것 같지만은 물 하나뿐이다라는 거지. 그게 인생이에요. 인생이 별거 없거든요. 하나인 거예요. 하나. 그래서 그 하나의 인생을 다 바라보면 거기에 답이 있지, 헤매는데 답이 있는 게 아니에요, 인생은. 돌아보는 데 답이 있다. 쫓아다니는데 답이 없어요. 근데 그 원리를 모르고 살면 쫓아다니고 쫓아다니고 쫓아다녀도 만날 마음이 부족해요. 인간은 고약한 것을 하나 가지고 있는데, 채워도 채워도 만날 비어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채워도 채워도 비어 있어. 채워지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이거 참. 아들 못 낳는 사람이 아들 낳으면 마음이 그득할 것 같지요. 천만에. 며칠 못 가요. 또 부자 되면 그득할 것 같죠. 그거 며칠 못 가요. 여행 한 번 갔다 오면 죽어도 소원이 없겠다 이런 말하거든. 여행 갔다가 집에 돌아오자마자, 집에 돌아오기도 전에 답답해요. 그러니까 인간은 뭐를 하고 뭐를 이루어도 채워지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요. 그게 왜 그러냐. 그게 번뇌의 마음이기 때문에 그런데, 번뇌는 하염없이 헤매고 쫓아다니거든요. 그래서 그 번뇌의 마음에 종살이 하지 말고, 우리는 번뇌의 마음에 종살이를 하면서 평생 살거든요. 그 본래 주인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돼요. 본래 주인, 그게 청정심인데, 주인의 마음으로 딱 돌아가면, 일체가 유심조라, 그 일체가 오직 마음이 만든 거예요. 그 본래 마음. 생각 마음은 고단하고 본래 마음은 편안하거든요. 그래서 그 본래 마음 하나로 돌아가면 모든 것이 편안한데, 그 번뇌 마음, 생각 마음으로 휘둘려 살기 때문에 그렇게 힘이 들어요. 이게 나의 번뇌가 나를 힘들게 한다. 번뇌는 뭐냐? 채워지지 않는 마음이다. 이 글 보는 사람도 마찬가지. 글 이렇게 많이 보면 모르는 거 없을 것 같죠. 책 많이 보는 사람일수록 모르는 게 그냥 가득한 거예요. 그러니까 박사 학위를 받으면 그때부터 모르는 게 생겨요. 그러니까 모르는 게 박사다. 그러니까 그전에는 모르는 거 없어요. 다 알아요. 공부, 책 안 볼 때는 다 알았는데, 책 보기 시작하면서 다 모른다. 이게 원리예요. 나는 아는 게 많다. 이런 사람은 책 안 본 사람이여. 책 본 사람은 봐도 봐도 끝이 없는 게 이 책 보는 번뇌 망상이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로 돌아가면 파수무진(波雖無盡)이나, 물결은 비록 끝이 없으나, 체언즉일(體言即一)이라. 체로, 본체로 말하면 곧 하나다.

 

       또 그러고 이 화엄에서는 약비차파(若非此波), 만약 동쪽에 있는 물결이 아니라면, 즉무피파(即無彼波)하고. 서쪽에 있는 물결이 있을 수가 없다. 이게 동쪽에 있는 물하고 서쪽에 있는 물하고 서로 균형을 이루어서 같이 공존하지, 서쪽에 물이 없다면 동쪽의 물도 다 빠져나가서 없다. 그래서 하나가 없으면 많은 것도 없다 이런 얘기예요. 그러니까 작은 것이 없으면 큰 것도 없으니까 작은 것을 싫다고 하는 것은 채워지지 않는 번뇌의 마음이고, 작은 것에 편안할 줄 알면 그것이 주인의 마음이다. 이제 이런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거 본문에는 그런 게 없어요. 이건 내가 해석하는 거예요.

       그리고 또 약비피파(若非彼波), 만약 서쪽에 있는 물결이 아니라면 즉무차파(卽無此波)하고, 곧 이 동쪽에 있는 물건이 없다. 그래서 시중문(是中門)자는, 이 가운데 일즉일체라고 하는 것은, 이것은 저것에 있고, 차는 재어피파(在於彼波)하고, 피파는 비자성고(彼波非自性故) 재어차파(在於此波). 저쪽의 물결은 자성이 없기 때문에 이쪽의 물결에 의해서 존재가 되고, 이쪽의 물결은 역시 또 자성이 없어서 저쪽의 물결에 의해서 존재가 된다. 그러니까 동해가 없으면 서해도 없고, 서해가 없으면 동해도 없다, 이거예요. 하나가 없으면 많은 것이 없고, 많은 것이 없으면 하나가 없고, 하나가 많은 것을 만들어내고, 많은 것은 하나가 만들어낸다, 뭐 이런 얘기고요.

        그러면 일중일체다중일이라고 게송이 앞에 나오고, 그다음에 일즉일체다즉일이라는 말이 이제 나왔는데, 하나 속에 모든 것이 있다. 이게 일중일체인데요. 이걸 화엄학에서는 그 중에 있다, 가운데 있다라는 뜻에서 중문(中門)화엄교설이라고 그래요. 중이라는 중자, 문 문자, 중문 화엄 교설. 중문. 그리고 일즉일체다즉일이라고 할 때 이 즉자를 써서 즉문(即門) 화엄 교설이라고 그래요. 즉문. 그래서 하나 가운데 모든 것이 있다 하면 중문이고요. 하나가 곧 모든 것이라고 하면 즉문이요. 이건 화엄학을 할 때 이게 이제 하나의 용어로 그렇게 쓰는 거예요. 중문화엄, 즉문화엄. 그러면 하나 속에 모든 것이 있다 그러면, 중문이고 하나가 곧 모든 것이다 그러면 즉문이거든요. 곧 즉자.

        그러면 일중일체다중일 이 언구는 뭐를 말하느냐. 사물에는 용이 있는데, 용이라는 건 뭐냐. 계속 변화하는 거예요. 변화하는 건 용이에요. 변화하는 게 뭐냐. 아이가 처음에 딱 출생을 하면 출생한 거 그대로 아이가 되고, 출생한 거 그대로 소년이 되고, 청년이 되고 계속 올라가는데, 이걸 유력문이라고 그래, 힘이 있다. 그 어른이 될 때까지는 계속 힘 있게 올라가요. 힘 있게. 이게 유력인데, 근데 언젠가부터 슬슬 빠지기 시작해요. 근데 빠질 때도 그 모습 그대로 빠지는 거예요. 자꾸 줄어들고, 줄어들고, 어릴 때 태어날 때 모습 없어진 게 아니에요. 마지막까지 올라가면 슬슬 빠져 이걸 무력문이라고 그래요. 유력 작용, 무력 작용. 이거 어려운 말인데 아주 재미있어요. 유력용, 무력용. 어릴 때부터 계속 성장할 때는 힘이 있어요. 이게 유력 작용이에요. 근데 올라갈 만큼 다 올라가서 점점 줄어들 때는 힘이 없어 무력 작용이에요. 그래서 이걸 숫자로 표현할 때 하나에서 둘 되고, 둘에서 셋 되고. 하나가 둘 됐다고 그래서 하나가 없어진 거 아니에요. 하나 그대로 둘이 되는 거예요. 둘에서 하나 빼면 그냥 하나죠. 이렇게 표현했어요. 숫자로 유력 무력을. 하나에서 둘 되면 하나 그대로 둘이 되고요. 하나가 셋으로 가면 하나 그대로 셋 돼요. 이게 이제 힘이 있는 거예요. 하나 그대로 넷 돼요. 이제 하나 그대로 열 되요. 그러면 열은 이제 만 수인데, 가득한 숫자 만 수가 돼가지고 내려와. 하나가 열이 9되요. 아홉이 8되요. 이래가지고 하나까지 되면 이걸 무력이라고 그래요. 무력. 유력으로 올라갔다가 만수로 갔다가 다시 본래 수로 내려오는 거를 유력문 무력문. 이런 것을 용문이라고 그래요. 일중일체다중일이라고 하는 것은 이 우주법계 인연법 중에 작용의 세계를 말하는 거다. , 쓸 용자, 문 문자. 이게 전부 이 세상 법칙이 다 이런 법칙이에요. 계속 발전할 때는 유력문이고, 쇠퇴할 때는 무력문이에요. 이렇게 돼요. 그래서 이것은 중문은 여등광상입고(如燈光相入故)로 등불이 있는데, 등불이 이 등불 등불빛이 저 등불에 들어가고, 저 등불 등불빛이 이 등불에 들어간다. 그래서 등광이 상입이라. 서로 들어간다. 여기 있는데 등불 빛은 서로 서로 들어가요. 하나가 둘 되고, 하나가 셋 되고, 뭐 이런 식으로 등광이 상입고로, 단제등용이상입이(但諸燈用相入耳). 이 등의 작용만 서로 들어갈 뿐이다. 등은 그대로 있는 거예요. 용이라고. 등불 빛만 이 등 불빛이 저 등불로 가고, 저 등불 빛이 이 등불로 간다. 이걸 그래가지고 등용이 상입이라. 등용, 등의 작용만 서로 들어간다. 이렇게 주석을 달았고요.

       즉문(即門)은 하나가 곧 일체니까, 작용이 아니라 본체다. 하나가 곧 일체니까. 즉문은 뭐와 같으냐. 파수상수(波水相收). 파수, 물결과 물이 서로 거둔다. 물은 물결을 만들어내지만, 물결이 바로 물이고, 물결이 바로 물인데, 물은 바로 물결이고. 물과 물결이 모양은 다르지만, 물에서 물결을 거두어들이고, 물결에서 물을 거둬들여서, 파수가 상수라. 물결과 물이 서로서로 거둔다. 그래서 파체수체가 무이(波體水體無二). 물의 그 본체와 또 파도의 본체가 둘이 없다. 그래서 이거를 상즉이(相即耳)라고 한다. 서로 작용이 오고 가는 것은 일중일체다중일 중문이고, 본체가 둘이 없는 것은 일즉일체다즉일 즉문이다.

 

       이렇게 주를 달아놨는데, 이런 거 보고 있으려고 그러면 참 보기도 힘들고, 보고 나면 또 정말 그런가 이게 사실이에요. 그래서 기록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기록을 봐도 자기 마음이 힘들이지 아니한 것은 만족할 수가 없어요. 내 마음에 힘들인 것만이 만족이 있어요. 공짜로 그냥 얻어 듣는 거는 절대 만족할 수가 없어요.

 

       이 정도 하고 끝내도 되는데, 역시 나도 만족할 수 없는 마음이 안 없어져서, 기억나는 이야기가 하나 있는데요. 허수아비 이야기예요. 허수아비. 옛날에 농촌에서 농사지을 때 가을이 되면 새들을 쫓는다고 허수아비를 밭마다 많이 세웠거든요. 근데 그 허수아비가 곡식을 다 거둬들인 다음에 초겨울이 되면 쓸모가 없어요. 그래서 이제 그 허수아비가 혼자 서 있는데 어떤 스님이 입을 게 없으니까 그 허수아비를 보고 허수아비를 만든 옷을 벗겼어요. 자기가 벗겨서 가져가서 입으려고. 그러니까 누가 지나가다가 얘기를 했어. “그 허수아비 옷을 벗기면 허수아비는 뭘 입고 삽니까?”이랬어요. 그런가 이게 그러니까 내가 뭘 잘못했나이런 생각도 들고, 미안한 생각도 들고, “허수아비 옷을 벗기면 허수아비는 뭘 입고 삽니까?” 대답이 잘 안 나왔어. 그래서 그냥 후닥닥 벗겨서 싸가지고 갔죠. 그런데 다른 데 또 가니까 똑같이 어떤 스님이 허수아비 옷을 벗기고 있어. 그래서 어떤 사람이 또 물었어. “그 허수아비 옷을 벗기면 허수아비는 무엇을 입고 삽니까?” 그러니까 이 양반은 도인이야, 도인. 확실히 일즉일체다즉일 일중일체다중일 이 도리를 아는 분이란 말이에요. 이거 딱 자세를 바로 하더니, “옷을 입지 않는 허수아비도 보십시오.” <이 세상에 옷 입는 허수아비만 있는 게 아닙니다. 옷 안 입는 허수아비도 보십시오.> 이거요. 그럼 이게 이제 뭐냐 그러면, 하나하나의 자기 체성이 없어서, 이것은 저것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저것은 이것에 의해서 만들어졌으니까, 허수아비가 자기 체성이 없이 나무하고 옷하고 거기 단단히 매는 끈하고 그것뿐이잖아요. 그러면 허수아비 자기 체성에서 옷이 허수아비이고, 나무가 허수아비이고, 그 나무와 나무를 잡으면 끈이 허수아비인거라. 그 이 세상의 모든 게, 하나는 하나의 자기 실체가 없고, 많은 것이 있을 때 하나가 있지, 많은 것 없는데 하나가 없거든. 그러니까 하나는 많은 것이 허수아비고, 많은 것은 또 하나가 없으면 많은 것이 없어요. 더 많은 것은 하나의 허수아비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는 허수아비만 자기 체성이 없이 그냥 옷을 입고 있는 게 아니라, 옷 안 입고 있는 이 천지 만물이 전부 허수아비와 같이 자기 체성이 없는 그런 것이다. 그러니까 <그대는 옷 입는 허수아비만 보지 말고, 옷 안 입는 허수아비도 보십시오.>

       썰렁합니다. 아주 썰렁해요. 아주 썰렁해. 그러니까 일체중생이 다 자성이 없어요. 인연법으로 다 이루어졌어. 인연법으로. 그러니까 허수아비예요. 허수아비만 자성이 없는 게 아니라, 일체중생이 다 자성이 없어. 자기 체성이 없어. 다 이것저것이 모여서 됐기 때문에 법무자성(法無自性)하야 이타위성(以他僞性)이라. 법에는 자성이 없어서 다른 것으로서 자성을 삼는다. 예를 들면 이런 거죠. 이게 화엄경 경책인데 이게 화엄경이에요. 이 화엄경의 자체 자기 체성이 없어. 종이하고, 화엄경 경문 내용하고, 요 실하고, 먹하고, 이런 것밖에 없는 거예요. 이게 허수아비인 거예요. 이게 자기 체성이 없는 허수아비. 그러니까 이 세상에 마음 밖에서 볼 건 하나도 없어요. 다 허수아비라. 자기 체성이 없어서. 오직 하나는 많은 것에 이루어지고, 많은 것은 하나에 이루어진다. 이걸 아는 그 마음만 밝히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좋다. 하나는 자성이 없어서 많은 것으로 이루어졌다. 많은 것은 자성이 없어서 하나로 이루어졌다. 이거는 법의 자성이 없어서 다른 것으로 자성을 삼는다. 이 말인데, 인연법이란 말이죠. 자성이 없다라는 건 인연법이란 말이에요. 그 인연으로 생긴 건 인연으로 사라지니까 자성이 없지.

 

        근데 여기 문제가 하나 있는 거예요. 뭐냐. 그걸 아는 놈이 있단 말이에요. 하나는 여럿에 의해서 만들어졌고, 여럿은 하나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그건 법이고, 그 법을 아는 놈이 있다 이 말이죠. 그게 불성이에요. 그래서 법은 있고, 불성은 광명이다. 그래서 이 불성광명(佛性光明)을 밝힐 때 모든 법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 불성광명을 밝히지 못하면, 법에 매달려. 법은 허수아비와 같은 건데 법에 미혹하고 법에 매달려서 그냥 그 속박이 많아요. 이제 자기 몸에 매달리니까 몸에 속박, 물질에 매달리니까 물질의 속박, 사람에 매달리니까 사람의 속박, 이것을 구박범부(具縛凡夫)라고 그래요, 불교에서는. 갖출 구, 얽힐 박, 그냥 그 얽힘이 부족함이 하나도 없이 다 구체적으로 다 갖춰져서 얽혔다. 이게 구박범부에요. 몸이 허수아비인데 자성이 없는데 몸에 얽히죠. 사람도 허수아비인데 사람에 얽히죠. 물질도 허수아비인데 물질에 얽히죠. 이걸 구박범부라 그래요. 얽힌 것이 끝도 한도 없다. 그런데 마음을 하나 딱 밝히고 나면 물질은 없고 일심은 광명이다. 물질은 없고 한마음은 광명이다.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