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법문

[신중기도] 6월 25일 정초신중기도 입재 법문 2025-06-25

 

 

 

안녕하십니까? 을사년 6월 초하루 진관사 법회에 법성게 중에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時無量劫) 이 구절인데요. 법성게 30구 중에서 제12, 12번째에 해당합니다. 10번을 먼저 독송을 하고 말씀을 이어가겠습니다. 시작.

 

일념즉시무량겁 일념즉시무량겁 일념즉시무량겁 일념즉시무량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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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념즉시무량겁 일념즉시무량겁

 

일념즉시무량겁이라. 일념은 한 생각이고 일 찰나인데, 한 생각이나 일 찰나가 한 생각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순간. 일 찰나. 한순간이 시간 속에서 제일 짧은 시간이에요. 이게 일념이고 일 찰나예요. 그런데 무량겁은 이 시간으로 계산할 때 계산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래고 먼 시간이에요. 이걸 무량겁이라고도 하고 구원겁(久遠劫)이라고 그럽니다. ‘오랠 구, ‘멀 원. 오래고 먼 세월이다. 근데 화엄경에서는 일 찰나가 무량겁이다. 이렇게 가르쳐요. 일 찰나가 무량겁이다. 이게 뭔 소리냐?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었는데 처음으로 정각을 이루었다. 이렇게 얘기를 해요. 시성정각(始成正覺)이라 처음으로 정각을 이루었는데, 정각은 바른 깨달음이거든요. 삼먁삼보리. 그걸 정각이라고 그러는데 삼먁삼보리는 바른 깨달음이다. 바른 깨달음이 뭐냐? 상의 상이 없고, 시간에 시간이 없다는 걸 깨달은 거예요. 탈 무상법하고. 무상법(無上法) : 없을 무, 형상 상, 법 법. 상은 일체법인데 일체법에 일체법이 없다. 이것이 통달무상법. 그렇게 번역을 해요. 통달무상법. 무상법을 통달했다.

 

그럼 뭐가 무상이냐? 첫째로 오온무상. 오온은 우리 몸이거든요. 오온이 무상하다. 형상이 없다. 또 보고 느끼는 십이처.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십이처가 무상하다. 또 안이비설신의, 색성향미촉법 그 속에는 중간에 눈이 경계에 부딪히면 안식이 발동을 하고, 근경(根境)이 상대해 식생기중(識生基中)이라. 이게 그냥 몸이 뭘 만질 때 그냥 촉감이 생기는 게 아니라 이 몸에서 인식이 발동을 해야 촉감을 느껴요. 그래서 이게 기절한 상태라든지 죽어 있는 상태는 축감을 못 느껴요. 그래가지고 우리가 죽었을 때 화장을 해도 시신이 뜨겁다고 안 뛰쳐나오는 거는 몸 모습은 있어도 의식이 발동을 안 해서 뜨거운 줄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육근, 육경, 육식 이게 18계인데 이게 다 무상법이다. 또 천지만물이 모두 상의 상이 없다. 이걸 깨달은 거예요. 이게 통달 무상법이에요. 그리고 과거, 현재, 미래가 현상에는 없고 기억 속에 있는데. 우리가 어렸을 때 느끼던 과거, 또 지금 느끼는 현재, 앞으로도 느낄 수 있는 미래가 있는데. 거기에 과거에는 또 과거가 있고, 현재에는 또 현재가 있고, 미래에는 또 미래가 있어서 한량없는 과거, 현재, 미래의 기억이 사람의 생각 속에 있고요. 또 세월이 한량없이 펼쳐져서 무량겁이 되는데, 그게 깨달음을 얻어서 정각으로 가만히 보니까 시간에 시간이 없더라. 이걸 깨달은 거예요. 요달무삼세(了達無三世). 3세가 없음을 요달했다. 요 자도 그 알 요자고 달자도 통달할 달자인데 딱 깨닫는 순간에 시간에 시간이 없다. 형상의 형상이 없다. 그걸 깨달은 거예요. 그러면 눈에 보이고 몸으로 느끼는 거는 뭐냐? 몸의 감각과 또 스스로 익힌 바에 의해서 어떻게 익혔느냐에 따라서 느낌이 생긴다는 거죠. 그러니까 익힌 대로 생각하고, 익힌 대로 듣고, 익힌 대로 보고, 익힌 대로 행동한다.

 

저 사람이 저런 행동을 하는 거는 지금까지 그렇게 학습된 바에 의해서 행동하는 거예요. 학습된 바에 의해서 먼저 생각이 형성되고, 그 생각이 행동을 해요. 생각이 없으면 절대로 행동할 수가 없어요. 그럼 생각은 어디서 나오느냐? 지금까지 경험하고, 배우고, 익힌 역사에 의해서 생각을 해요. 그래서 이거 우리가 보는 세계 형상이라든지 시간의 길고 짧은 것은 스스로 이 몸의 감각 또 익힌 학습에 의해서 느끼는 거지, 없다. 그리고 없는 건 뭐냐? 이제 이거를 설명하는 게 법성게인데. 법은 만법(萬法), 십법(十法). 십법이 뭐냐 하면 지옥, 아귀, 축생, 인도, 천도, 아수라 육도에다가 성문, 연각, 보살, 불 이렇게 사성(四聖)을 합해서 십법이라고 그래요. 십법계가 있고, 육도법이 있고, 천지만법이 있는데, 이게 법인데, 그 법의 본성을 들여다보니까 그 십법과 육도 만법이 다 둘이 아니야. 둘이 아니에요. 그래서 그 둘이 아닌 거를 화엄에서는 어떻게 표현하냐면은 무이(無二)’. ‘없을 무, ‘두 이. ‘둘이 없다이렇게 표현하고. 원융하다. 원융이라는 것은 하나가 있으면 다 통한다이거죠. 하나는 하나에 머물지 않고 전체와 통하고. 전체는 전체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하나와 통하고. 그래서 이 법의 근원, 법의 본성은 원융하고, 둘이 없고, 이걸 깨달은 거예요.

 

그 법에서 법성을 깨달은 거예요. 그래서 그 법성을 설명하는 게 법성게인데 그럼 법성은 뭐냐? 부처님의 깨달음 세계예요. 깨달음으로 법성을 보았지, 깨닫지 못하면 법성을 못 보거든요. 그러니까 이 법성게라는 것은 부처님의 깨달음의 세계를 설명하고 있어요. 그래서 이 원융이라고도 하고 또 무이, 둘이 없다고도 하는데, 이 깨달음을 이룬 부처님의 세계는 원융과 무이를, 둘이 없는 것을 무애, 없을 무, 걸릴 애, 무애로 나타내요. 그래서 화엄경에는 무애라는 말이 제일 많이 나와요. 걸림이 없다. 무애는 원리만 말하는 게 아니라 인격도 되는 거예요. 무애가 뭐냐? 일 찰나가 무량겁을 그대로 보고, 느끼고, 행동하는 거예요. 부처님은 늘 법성의 깨달음에 의해서 무애의 경지에 계신다. 이렇게 가르치는 게 화엄경이고, 그 화엄경을 30구로 표현한 게 법성게거든요. 무애라는 게 뭐냐? 일 찰나에 있으면서 그대로 무량겁이고 그게 무애예요. 일 찰나가 무량겁의 장애를 받지 않는다, 이거거든. 또 무량겁이면서 일 찰나의 장애를 받지 않고. 그러니까 일념이 무량겁이고 무량겁이 일념이고. 이게 뭐예요? 그럼 이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 십법계, 또 무량겁에 다 통하는 거예요. 이게 무애예요. 그러니까 이 팔 하나 이렇게 늘면 이렇게 아주 간단하잖아요. 이게 십법계 무량겁에 다 통하는 게 이게 무애예요. 그래서 무애를 다른 말로 하면 구경행(究竟行)이다. 반야심경에 구경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구경이라는 말은 그거 밖에는 없다이런 소리여. 그거 말고 또 다른 게 더 있으면 나머지가 있는데, 유여인데 유여. 그거 말고 나머지는 없다 이게 무여거든요. 그러면 이것 말고 다른 것은 없다. 이렇게 표현할 때 그걸 구경이라고 그래. 이것 말고 다른 건 없다. 그러면 손 한번 이렇게 들면 이거 말고 다른 게 없는 거예요. 이게 구경행이고 구경법인 거예요. 숨 한 번 이렇게 쉬면 그것 말고 다른 거 없는 거예요. 그것이 구경행이다. 이 숨 쉬는 거 외에 다른 거 없다. 이것 말고 다른 거 없다. 이게 구경행 구경법이다.

 

그래서 이제 이런 걸 표현할 때 법성게에서는 원융, 무이, 무애, 구경 이런데, 이거를 일중의 일체요 다중의 일. 하나 가운데 일체고, 많은 것 가운데 하나다. 하나가 일체의 장애를 받지 않는다. 일체가 하나의 장애를 받지 않는다. 이게 전부 원융무애법이거든요. 그다음에 일즉일체다즉일. 하나가 곧 모든 것이고, 모든 것이 곧 하나다. 그러니까 하나가 모든 것의 장애를 받지 않고, 모든 것이 하나의 장애를 받지 않는다. 일즉일체다즉일. 일미진중함시방. 가는 티끌이 시방세계의 장애를 받지 않는다. 시방 세계가 가는 티끌에 장애를 받지 않는다. 일체진중역여시. 티끌 티끌마다 다 그렇다. 무량원겁즉일념. 한없이 많은 오랜 세월이 바로 일 찰나고, 일 찰나가 한없이 많은 오랜 세월이다. 이제 그다음 두 구절이 더 있죠. 구세십세호상즉, 잉불잡란격별성. 8구가 법성원융, 또 법성무이, 또 법성무애, 법성구경 이걸 설명하는 거예요. 법성은 원융이요, 법성은 무이요. 무이를 아까 뭐라 그랬죠? 둘이 없다. 또 법성은 뭐예요? 또 법성은 구경이다. 이게 그런 거거든요. 그래서 무량원겁즉일념, 일념즉시무량겁. 부처님이 깨달은 게 법은 각자 자성이 없다. 법무자성이라. 그릇은 그릇의 자성이 없고, 또 허공은 허공의 자성이 없고, 이것은 이것의 자성이 없고, 저것은 저것의 자성이 없는데. 그럼 어떻게 생겼느냐? 의타기성(依他起性)이라, 다른 것으로 자성을 삼는다. 이게 그릇이 되기 위해서는 흙도 있고, 뭐도 있고, 전부 이 그릇 아닌 걸로 이루어진 거예요. 이게요. 허공도 그래요.

 

그걸 피안 세계라고 그래요. 그래서 피안 세계라고 하는 거는 현재 생로병사 속에서 생로병사가 없는 경지에 도달하는 걸 피안에 도달한다 이래요. 그게 극락세계예요. 도피안 극락세계. 거기까지만 해도 이제 그게 보살이에요. 또 세월 속에 세월이 없는 걸 알아요. 그게 도피안, 피안에 도달하는 거예요. 그렇게 도달하고 나면 그게 정각인데, 바르게 깨달은 건데, 시간에 시간이 없고, 또 세계에 세계가 없는 걸 다 마음으로 통달해서 몸으로 얻고 나면, 이 깨달음이라는 거는 몸과 마음이 함께 이루어지는 걸 깨달음이라고 그래요. 마음은 도달했는데 몸은 못 도달하고 그거 아니에요. 몸도 도달하고 마음도 도달하는 걸 깨달음이라고 그래요. 예를 들면 내가 죽음이 없는 걸 알긴 알았는데 죽을 때가 다 되니까 죽는 게 무섭고 걱정된다. 그러면 그게 깨달은 거겠어요? 못 깨달은 거겠어요? 이제 많은 사람들이 그거를 헤매요. 내가 깨닫긴 깨달았는데 왜 지금도 걱정되고 근심되냐고. 그건 아직까지 몸이 도달하지 못해서 그래요. 그래서 마음으로 알았으면 몸이 그 세계에 갈 때까지 계속 닦는 게 그게 정진이예요. 마음으로 알았다고 몸 닦는 거 내던지면 그거 안 돼요. 그냥 깨달은 그 마음의 경지에 멈춰 있거나 잘못하면 다른 습관이 더 끼어들어가지고 더 후퇴를 해버려. 그 후퇴하는 걸 나쁜 말로 하면 깨달은 후에 다시 미혹한다 그러는데 다시 미혹은 아니고 알긴 알아. 근데 몸은 몸대로 가. 생각은 생각대로 가고. 그 생각은 해탈인데 몸은 지금 계속 삶과 죽음을 반복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몸이 될 때까지 노력하는 게 그게 정진이다 이거죠.

 

이 정각 공덕으로 정각을 딱 했으니까 이게 여기서 큰 천지개벽이 일어나는데, 이 희로애락 생로병사, 생사에 헤매고 골몰하던 그 생각이 맞아 맞아 맞아 맞아 맞아 맞아 맞아 맞아 맞아 맞아요. 맞는 거예요. 생로병사 생각이 둥글고 밝은 원명대지(圓明大智)가 돼요. 이 생로병사, 이 희로애락, 근심 걱정의 생각이 둥글고 밝은 큰 지혜가 되는 거예요. 이걸 불지혜라 그래요. 생각이 지혜로 변하는 거예요. 왜 변하냐, 그 깨달은 공덕으로. 정각 공덕으로 대지가 출연이라 대지가 출연한다. 그다음부터는 항상 그 정각 공덕으로 얻은 그 원명대지, 둥글고 밝은 큰 지혜에 머물러 있어요. 그게 부처님이에요. 보살은 이 삶과 죽음 속에서 삶과 죽음이 없는 것을 보는 게 보살인데, 이 부처님은 생사가 없는 지혜에 상주한단 말이에요. 항상 머물죠. 항상 머물러 있어 그냥. 상주(常住). 상주 불지(佛地)하야. 상방광명(常放光明)하니 항상 지혜의 광명을 비추고 있어요. 보살경지만 하더라도 입정을 하면 깊은 마음의 세계에 들어가지만, 출정을 하면, 정에서 나오면 중생이 느끼는 걸 느낀다. 그래서 입정, 출정을 달리 느끼는 게 보살인데 부처님은 입정, 출정이 없어요. 상방광명이 그냥 항상 광명을 비춰. 마음을 잃어버린 때가 있어야지. 찾을 필요가 없는 거예요.

 

그게 부처님이 상방광명이라는 게 잃어버린 일도 없고, 찾는 일도 없는 게 상주 불지하야. 항상 불지에 머물러서 상방광명하니 항상 광명을 비추니. 뭐냐, 시명 무애라. 이것이 이름이 무애라 걸림이 없는 거다. 이게 화엄경 부처님 정각 경지 무애 법문이에요. 정각 경지는 무애다. 그럼 무애 그거 얼마나 좋아. 이거 하나 이렇게 들면 이게 구경법이요. 둘 하면 이것도 구경법이에요. 셋 하면 이게 구경법이야. 구경법 아닌 게 없어요. 이걸 730구로 노래한 게 법성게예요. 그러니까 오늘은 일념즉시무량겁 그거 하거든요. 그래서 이거를 화엄경에서 몇 가지 계송을 이제 적어 봤는데, 삼세소유(三世所有) 광대겁(廣大劫)을 불염념중개시현(佛念念中皆示現)이라. 삼세에 있는 바 광대한 겁겁의 세월을 부처님이 생각 생각에 다 나타낸다. 무량한 세월을 한 생각 한 생각에 다 나타내는 거예요. 한 생각이 무량겁이라는 거예요. 또 뭐냐 이게. 피제성괴일체사(彼諸成壞一切事)를 부사의지(不思議智)로 무불요(無不了). 그 무량겁 안에 있는 성립도 되고, 파괴도 되고, 없어지기도 하고, 생기기도 하는 일체의 모든 일을 부사의지로. 부처님의 이 깨달은 지혜는 생각할 수 없는 지혜인데 왜 생각할 수 없느냐? 찾아보면 무주불지(無住佛智), 머무는 데가 없는 부처님의 지혜요. 그런데 이 작용으로 보면 무변불지(無變佛智), 끝이 없는 또 부처님의 지혜예요. 그러니까 생각할 수가 없어요. 무주무변이다.

 

우리 생각도 그렇잖아요. 가만히 보면 없어! 생각이 어디 있는지. 그런데 온갖 생각을 다 해요. 무변이야 그냥, 끝이 없어. 그러니까 이 인생이 나고 죽는 건 허수아비와 같고, 그 마음에서 일어나는 마음은 이 사람과 같다. 사람이 허수아비 만들기도 하고 없애기도 하잖아요. 그게 인생이에요. 그러니까 뭐 온갖 생각을 다하고, 온갖 자랑을 다하고 하지만은 다 일장춘몽이요. 하루 저녁 꿈과 같은 거예요. 젊을 때는 그거 모르죠? 근데 한 70쯤 되면 알게 돼요. 70년 동안 이룬 것이, 아무것도 남는 게 없어요. 지금까지 숨 쉰 것뿐이야. 너 뭐 했냐, 그래. 너 뭐 했냐? 그러면 그런 소리 하지 마라. 지금까지 숨 쉬고 있었다. 그거 딱 맞는 소리예요. 숨은 쉬었잖아요. 그것만 남는 거요. 남는 거 하나도 없어요. 그게 인생이요. 그러니까 그게 한 생각이다. 인생은 한 생각. 한 생각이 맑아지면 자기가 머무는 데가 없이 우주 만상에 가득한데 한 생각이 혼탁해지면 바쁘기만 바쁘고 남는 건 하나도 없는 인생을 살게 돼요.

 

그다음도 이제 게송이 있는데 어념념중실명요(於念念中 悉明了). 불가사의무량겁(不可思議無量劫). 이 깨달은 부처님에게 지혜인데, 지혜는 생각 생각에 불가사의한 무주원명한 그 대지로 무량겁을 다 본단 말이에요. 보고 와라. 이제 부처님은 지혜라는 게 능견능지를 해요. 능견은 본다 이거고. ‘능할 능자 능지는 안다 이거예요. 보고 알기는 다 아는데 취사선택은 안 해요. 이건 취하고 이건 버리고 이렇게 선택을 안 해. 왜냐하면 취사선택을 해봐야 그건 허망하고 무상해서 자성이 없기 때문에 아무 쓸데가 없어요. 오래 산다고 애만 썼지 죽는 순간에는 지금까지 숨 쉰 것만 남고 남는 게 하나도 없어. 그러면 그 숨 쉬는 줄 아는 그 생각은 있단 말이에요. 그놈이 이제 성불하면 해탈 대지혜로 바뀌는 거예요. 아는 놈이 있어요. 거기에 해답이 있고 그게 열쇠요, 열쇠. 늙는 거 아는 놈, 죽는 거 아는 놈, 무서운 거 아는 놈. 그놈을 딱 돌아보고 그놈을 밝혀내면 그게 모든 것이예요. 그걸 가르치는 게 화엄경이에요.

 

그래서 불가사의 무량겁을 부처님이 염염 중에서 다 안다. 다 밝게 안다. 보고 알아요. 그런데 이걸 취하고 저걸 버리고, 이 취사선택은 안 해요. 그래가지고 여시요지삼세겁(如是了知三世劫). 이같이 삼세겁을 알아서, 구족안주구경행(具足安住究竟行)이라. 구경행에. 구경행이라는 거는 조그마한 거 떠나서 많은 게 없고, 가는 걸 떠나서 오는 게 없고, 앉는 걸 떠나서 가는 게 없고, 하나하나 티끌티끌이 다 구경법이고 구경행이다. 이걸 알아가지고 거기에 구족안주한다. 모자람이 하나도 없이 편안히 머문다.

 

이제 이렇게 부처님의 깨달음의 세계를 설명하고 있어요. 우리 지금 머무는 세계하고는 다르죠. 그럼 우리가 우리하고 다른 세계를 왜 말하나? 이 말이라도 듣는 게 이게 참 불가사의한 거예요. 꿈꾸는 사람이 꿈 깬 세계가 있다는 걸 듣기만 해도 그게 엄청난 거예요. 그래서 법문은 듣고 알려고 하지 마라. 믿어라. 원력을 세워라. 정진하라. 믿고 원력을 세우고 정진하면 그 공덕이 쌓여서 깨닫는 거지 듣고 아는 게 아니에요. 생각으로 어떻게 생각 밖의 것을 알아? 이건 깨달음의 세계인데. 이 구족안주구경행이라. 구경행이 딴 거 아니에요. 걸음 한 걸음 이렇게 내디디면 그것밖에 없어요. 그것밖에 없는 걸 구경 행위라고 그랬잖아요. 앉으면 앉는 게 구경 행이고, 서면 서는 게 구경 행이지 그것밖에 없다. 거기에 그냥 모자람이 없이 편안히 머문다. 이렇게 가르치고 있어요.

 

일일진중(一一塵中)에 무량신(無量身)이라. 하나하나 티끌 속에 무량한 몸이 있다. 이게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 이런 것처럼. 이렇게 되고 또 거기에 부현무량장엄찰(復現無量莊嚴刹)이라. 그 하나하나 티끌 속에 한량없는 장엄한 세계가 있어요. 많이 꾸며놓은 세계. 장엄찰을 나타내니. 어일념중(於一念中)에 실개견(悉皆見)이라. 한 생각 한 생각 속에서 그 무량신, 무량장엄찰을 다 봐. 그러니까 시무장애정법문(示無障礙正法門)이라. 이것이 장애가 없는 무이법, 둘이 없는 법. 또 무애법, 장애가 없는 법. 또 구경법. 그 구경법의 장엄세계다. 장엄문이다. 이런 거 가르치는 게 화엄경이에요. 그러니까 화엄경은 특별히 부처님 되는 법도 가르치고, 부처님 된 세계도 가르치고. 둘을 다 가르쳐요. 그래서 인과(因果)가 다 원만하다. 이게 화엄경이. ()는 부처님 된 세계고, 또 인()은 부처님 되는 길이고요. 그래서 길은 보살행을 말하고, 과는 이제 부처님 깨달은 경지를 말하거든요.

 

삼세소유일체겁을, 삼세에 있는 바 일체의 세월을. 오일념중에 능실현하니, 한 생각 속에 다 나타내니. 유여하나 무소유하야, 마치 인도에는 그전부터 마술이 아주 심했어요. 마술 뭐 이제 허깨비, 우리나라로 말하면 허수아비 같은 거예요. 허수아비가 크게도 만들고 작게도 만들고. 또 그걸 또 뭐라고 그러더라. 저 성 같은 데서 옛날에 그 사람을 하나 이렇게 만들어 놓고 뒤에서 줄로 조정을 해서 그 만들어진 사람이 움직이도록 하는 거. 그런 걸 환화(幻化)라 그래요. 환은 허수아비고 화는 변화한단 말이거든. 그게 모양은 있는데 알맹이가 없잖아요. 그래서 일체 시간이나 일체 사물에는 모양은 있는데 속 뼈가 없다. 이 물건에 속 뼈가 없다는 거예요. 이거 보이는데 이걸 깨 보면 이 안에 속 뼈가 없어요. 이걸 무상법이라 그래요. 그리고 이게 시간도 어떤 때는 1분도 굉장히 긴데, 이 인생을 돌아보면 80년도 한순간이요. 1분도 길고 80년도 한순간이다. 그 시간이 없는 거예요.

 

인생은 잠깐이다옛날 노인들이 그랬는데 그때는 저렇게 나이 먹어서 뭐 했나 이 생각이 들더라. 물어보면 아는 게 하나도 없어요. 저 나이 먹도록 뭐 했나 그런 생각 들었거든요. 근데 그 죄 받는다고 내가 지금 꼭 그 짝이에요. 이 늙어서 느끼는 인간은 뭐 50, 60년이 한순간이에요. 이게 노인의 시간 느낌이에요. 근데 바쁠 때는요. 1분도 얼마나 길어요? 그래서 이 시간이라는 거는 정해진 게 없는 거예요. 느끼는 사람마다 다 다르다 이거거든요. 그래서 이게 허깨비와 같고, 그 허깨비의 움직임 것 같다, 이거죠. 시명제불무애법(是名諸佛無礙法)이라. 이것이 이름이 모든 부처님의 무애법, 걸림 없는 법이다. 하나에서 많은 것의 걸림이 없고, 많은 것에서 하나의 걸림이 없다. 일 찰나가 무량겁에 걸림이 없고, 무량겁이 일 찰나에 걸림이 없다.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