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관사 소식

[일요법회] 선우스님 법문 2018-03-11

불기 2562(2018)년 3월 11일 오전 10시 30분,

<진관사 일요법회>를 함월당에서 봉행하였습니다.

이번주 법사로 모신 선우스님께서는

제행무상과 제법무아의 가르침에 대해 말씀해주셨습니다.

불교에서는 이 순간을 다시는 오지 않을 순간으로 봅니다. 또한 법문의 내용을 현실에 바로 적용할 수 있는 종교가 불교입니다. 불교의 법문은 똑같은 법문을 들어도 매번 다릅니다. 따라서 방관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불교의 세계관은 이미 여러분의 마음속에 들어 있습니다.

불기는 부처님의 열반을 기준으로 합니다. 열반이 기준이 되었다는 것은 서구학자들이 날짜를 삭감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서구에서 불교의 눈은 보통 종교에서 보는 눈이 아니다 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매순간 경직되어선 안 됩니다. 좀 전 질문에 답을 틀린 건 아주 잘 한 것입니다. 실수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큰 기쁨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예술가는 정형화된 것 보다 피카소 같은 비정형이 더 환영받습니다. 

진관사는 석가모니께서 말씀하신 경전에서 시작을 하고, 부처님께서 마지막으로 말씀하신 내용을 실천하는 도량입니다.  "당신은 부처님이십니다." 이 말이 잘 나오지 않습니다. 올 해는 이 결사를 시작하는 해입니다. 이 법회 후에는 결사의 의미를 의심 없이, 확신을 가지고 가셔야합니다. 분노가 일어나는 대상에게  "당신은 부처님이십니다."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의 번뇌가 일어나면 실천으로 연결되지 못합니다.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 "당신은 부처님이십니다." 말씀이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설법해놓으신 팔만사천대장경의 어디에 속하며, 어떻게 귀결되어 실천에 이르게 되는 지로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가슴에 손을 대고 내 목소리를 내가 들어봅시다. 심장이 함께 울리는 그 고동소리를, 진동을 함께 느끼면서 내 온 몸의 감각을 내 몸에 집중해 보는 것입니다. <아~~~오~~움>이것이 <옴>입니다. <옴 마니 반메훔> 여러분의 소리를 들으셨습니까? 차분한 목소리로 합장(합장의 의미는 “저는 지금 행동과 말과 마음이 그대로 그 모습입니다.” 라는 의미입니다.)하고 눈을 뜨고 저를 보십시오. 합장한 손은 심장의 가운데에 똑바로 하시고, 다음과 같이 따라하십니다. 여기서 당신은 바로 여러분입니다.

당신은 부처님이십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불교의 엄청난 가르침 중에 어떤 것도 바로 실천할 수 있도록, 현대의 언어로, 슬로건으로 제대로 제시하지 못했는데, 한국 진관사에서 과감하게 <당신은 부처님이십니다.>을 실천해보고자 현수막을 거셨습니다. 그 도량에 앉아계신 것만으로 여러분은 복이 많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어떤 경전의 말씀일까요? 하나뿐인 태자셨는데도, 다 버리고 출가하신 석가모니는 처음에 설법을 하시려고 부처님이 되고자 하신 게 아니었습니다.

(※ 위빠사나 운동은 아함경을 기준으로 합니다. 부처님 사후에 최초로 결집된 경전입니다. 그런데 묘법연화경은 열반하시기 전 8년 동안 설법하신 내용을 모아둔 것입니다.)

바로 출가해서 깨달음을 얻고자 하실 때에는 여러분과 똑같았습니다. 괴롭고 바라는 것이 있는데 얻어지질 않습니다. 계속 반복하면 달라지지 않고 그대로입니다. 하나씩 버리고 방향제시를 해야 달라집니다. 부처님께서 출가까지 해서 깨달음을 얻고자 한 것은 우리와 똑같이 고통스러웠기 때문입니다. 행복하지 않아서 방법을 찾아 스승을 찾아다닙니다. 최고의 스승을 찾아다녔으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생로병사의 고통이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히말라야 산속에서 6년 고행을 하십니다. 그 뒤에 완벽하게 깨달으십니다. 해탈(산스크리트어로 Nirvana니르바나)을 얻으셨습니다. 그 후 부처님께서는 바로 열반을 하시려고 합니다. 그때 천신이 내려와 법을 청합니다. 신도 괴로움이 있는 존재입니다(범천의 권청梵天勸請). 불교의 세계관은 인간세계, 사바세계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때 최초로 설법하신 경전이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입니다. 부처님께서 그 때 번뇌를 일으키십니다. <내가 깨달은 것을 다른 자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까?> 그래서 21일 동안 화엄경을 설하십니다. 그러나 화장세계라는 말이 어렵습니다. 세상은 이미 완벽한데, 왜 우리는 괴로울까. 따라서 그 설법을 천신들이 못 알아듣습니다. 그래서 고민을 하시다가 부처님과 함께 수행했던 5명의 비구승이 있던 녹야원(※이때부터 대승의 이야기입니다. 석가모니께서 고행정진만이 깨달음의 길이 아님을 깨닫고 수행을 멈추고 목욕을 한 후 처녀가 올리는 유미죽을 먹자 비구5명이 떠남)으로 가십니다. <중생들에게 고행도 아니고 쾌락도 아니고 중도를 가야한다.> 반듯한 깨달음의 시작이기도 하지만, 대승경전에서 얘기한 것입니다. 지금 소승만을 이야기 하면 안 됩니다. 5명의 비구에게 설법하신 것이 최초의 설법이십니다.

40년 동안 소승과 대승이 부딪혀왔습니다. 대승은 부처의 말씀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던 것이 2010년 전후에 일본의 사사끼교수가 발표한 12편의 논문에서 제자리를 찾게 됩니다. 소승의 경전에서도 대승경전에서도 똑같이 <결혼하지 말아라, 대궐 같은 집을 가지지 말아라, 분소의(糞掃衣, 가사, 시체를 쌓던 옷)를 수하라,> 등등의 계율이 자세히 기록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공주(소승과 대승의 스님들이 같이 거주, 공부)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는 것입니다.

금강경 (※ 금강경도 대승경전입니다. 조계종의 경전이 금강경입니다.) 이 바로 중도입니다. 초기경전과 대승경전에서 변하지 않는 것 세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삼법인. 소승과 대승에서 말하는 삼법인은 한 가지만 다르고 두 가지는 같습니다.

첫째, 세상에는 영원한 것이 없습니다. 변합니다. 나는 변합니다. 매일 괴롭지만은 않고 웃을 일도 있고, 슬픈 일로 변할 수 있습니다. 너무 미운 사람이 있지만, 언젠가 그 사람이 나를 도와줄 수도 있습니다. 제행무상(항상상常). 다른 종교는 왜 싸울 수 있는가. 이생이 끝나면 저 세상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불교는 다른 종교의 의견까지를 다 존중해주는 종교입니다.

두 번째 진리는, 내 가족도, 내 몸도 내 맘대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내 것은 내 소유고 내 마음대로 된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으므로 무아 . 세상은 내 맘대로 안 되므로 제법무아.

이 두 가지 축이 소승과 대승에서 같습니다. 달라이 라마도 이 두 가지가 있어 소승과 대승이 같다고 하셨습니다.

불교에서 제행무상의 행은 움직임이고 이것을 업이라고 합니다. 불교의 실천방향은 <업을 바라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행이 업이고, 업에는 선업도 있고 악업도 있습니다. 선업과 악업을 선택하기 위해 부처님의 말씀을 배워야하는 것입니다. 업을 바로 바라보고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어야합니다. 초기에 부처님께서는 업이 소멸 안 된다고 설법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 당시 인도에는 윤리도덕이 없어서, 사람까지 죽여 복을 받겠다고 했습니다. 업이 쌓인다고 겁을 주실 수 밖이 없었습니다. 선업과 악업을 짓는데 혼자가 아니라 누구랑 만나서 짓게 됩니다. 그것이 인연법입니다. 몸으로, 말로, 마음으로 짓는다. 즉 신구의로 업을 짓게됩니다. 착한 일, 착한 마음을 일으키는 충실한 순간이 거의 없을 때, 악업을 짓게 된다 고 얘기하셨습니다.

마음속으로 미운사람을 생각하되, 고맙고 환희로운 눈빛으로 미소를 띄우고 합장을 합니다. 이 행이, 이 업이 한순간도 진정성있게 연습을 하지 않으면 내 것으로 안 됩니다. <내 맘대로 안 되는데 저 사람을 내가 내 남편으로 생각했구나. 내 가족으로 있으니 고마운 것을>. 이러면 용서가 될 뿐만 아니라 숙세의 업도 녹아내립니다. 여화분고초라. 전세계를 다 덮을 악업을 지은 사람도 성냥개비 불 하나로 다 없어질 수 있습니다. 신구의 삼업의 극단의 마지막 선업은 <너 안의 부처를 만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부처의 미음이 꽃에도 나비에도 벌레에도 있습니다. 그것이 법화경의 말씀입니다.

가장 환희로운 눈빛과 감사한 미소로 <나는 지금까지 참 잘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환희로운 마음으로 모든 분노를 녹이겠습니다. 그러므로 지은 죄는 소멸되어 지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마음이 환해지이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있는 한자리의 마음을 불성이라고 하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가 모임이 끝날 때 <성불하십시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대웅전 앞에 걸린 현수막의 말로 풀겠습니다. <당신은 부처님이십니다.>

몸으로는 지극히 합장을 하고, 말도 환희롭게 감사하게, 차분하게 하셔야 합니다. 내 몸의 세포에 부처님의 씨앗이 60억 개 넘게 있습니다. 이 60억 개 넘게 부처님을 모시고 다니시는 당신이 여러분의 몸으로 생각하고 함부로 행동하고 말하고 안 좋은 마음을 일으켰다면 <당신은 부처님이십니다.>를 내게, 나를 이끌어준 내게 아침에 3번하고 시작해보세요. 약속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