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법문

[신중기도] 4월 28일 정초신중기도 입재 법문 2025-04-28

 

義相祖師法性偈 이야기 11

의상조사법성게 이야기 11

--一切塵中亦如是 (10).即事法 明攝法分齊--

-- 일체진중역여시(10).즉사법 명섭법분제--

 

 

        안녕하십니까? 을사년 4월 초하루 진관사 법회 법문입니다. 오늘 법문은 의상조사 법성게 39 게송 가운데에 열 번째 게송 일체진중역여시(一切塵中亦如是), 일체진중역여시, 그 게송에 관한 법문입니다.
         먼저 10번을 외우고 그다음에 말씀을 시작하겠습니다. 시작.

일체진중역여시 일체진중역여시 일체진중역여시 일체진중역여시

일체진중역여시 일체진중역여시 일체진중역여시 일체진중역여시

일체진중역여시 일체진중역여시

        화엄경에서 가르치는 내용은 부처님이 깨달음의 세계를 얻으셨는데, 깨달음의 세계가 어떤 세계인가. 무법유심(無法唯心)이라. 없을 무, 법 법, 오직 유, 마음 심, 무법, 법은 없고, 오직 마음이다, 그거예요. 법은 없고 오직 마음이다. 그럼 법이 왜 있냐. 의식 사량(意識 思量)으로 법이 있다. 뜻 의, 알 식,의식, 생각 사, 헤아릴 양, 의식으로 생각하고 헤아릴 때 법이 나타나고, 지광명조(智光明照), 지혜광명이 밝게 비칠 때는, 지광이 명조할 때는 일체가 유심이다. 모든 것이 오직 마음이다. 그래서 깨달은 분은 지광명조로, 지혜광명이 밝게 비추는 걸로 계시는데, 그걸 불주 세계라고 그래요. 부처님이 머무르는 세계다. 지광명조는 불주 세계다. 지혜 광명이 밝게 비추는 세계는 부처님이 머무는 세계다. 그 중생은 의식 사량을 가지고 사니까, 의식 사량으로 종종집착이라. 생각으로, 생각을 해서 가지가지로 집착을 하는 것이 그게 범부거든요.

        그래서 이런 내용을, 의상 스님께서 법은 없고 오직 마음이다, 이런 내용을 의상 스님께서 739, 일곱 자로 된 39 게송으로 지으신 것이 법성게인데요. 거기에 아홉 번째 게송, 열 번째 게송이 일미진중의 함시방이라. 하나의 작은 티끌 속에 시방 세계를 다 포함하고 있다. 이 말은 하나의 작은 티끌 속에 시방 세계가 다 들어간다, 이 소리예요. 함시방. 그러면 어떤 한 티끌만 그런 게 아니라, 일체진중에, 모든 티끌티끌마다 시방 세계가 다 들어간다, 역여시, 그 말이거든요. 그러니까 일미진중함시방하니, 한 작은 티끌 속에 시방 세계를 다 거두어 삼키고 있으니, 일체진중역여시라. 모든 티끌 속에서도 또한 이와 같이 마찬가지다. 이제 이 얘기인데, 그게 우리 의식 사량으로 보기에, 생각으로 이렇게 눈 뜨고 보고 귀로 들을 때, 미진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보이지도 않는 작은 티끌이고, 시방세계라고 하는 것은 가도 가도 끝이 없는 큰 세계인데, 이렇게 큰 세계가 이렇게 작은 세계로 어떻게 들어갈 수 있는가. 그게 이제, 가장 작은 세계로 가장 큰 세계가 어떻게 들어가느냐. 이것이 의식 사량의 세계거든요. 근데 지광명조에는 그렇게 되는 거예요. 의식 사량으로는 안 되고. 지혜 광명이 밝게 비출 때는 그렇게 되는데, 그 지광명조의 세계를 해인삼매라고 그래요. 지광명조는 해인삼매다.

 

一微塵中 十方世界 各無自性 同是無住

일미진중 시방세계 각무자성 동시무주

塵小界大 須處須耳 法性無二 無住實相

진소계대 수처수이 법성무이 무주실상

 

 

        그러면 지광명조 해인삼매는 어째서 그렇게 되냐 그러면, 일미진중에, 일미진중에, 일미진중과, 하나의 작은 티끌속과 시방세계가 시방의 어마어마한 큰 세계가 각무자성(各無自性)하야, 각각 자체 본성이 없다. 이걸 보는 게 지광명조예요. 미진의 자체 본성이나 시방세계의 자체 본성이나 각무자성이라, 각각 자체의 본성이 없다. 티끌의 본성과 세계의 본성이 티끌에도 티끌에 자기 본성이 없고 세계에도 세계의 자기 본성이 없다. 그래서 동시무주(同是無住). 똑같이 미진이나 세계나 머무는 데가 없다는 거예요. 그래 가지고 세계도 세계에 머물지 않고, 미진도 미진에 머물지 않고, 미진에는 미진의 자성이 없고, 세계에는 세계의 자성이 없어서, 티끌에는 티끌이 없고, 세계에는 세계가 없다. 그것을 어떻게 보느냐. 깨달은 지혜 광명으로 딱 밝혀 보면 그게 환히 보인다. 그게 해인삼매죠. 왜 해인삼매라고 그러느냐? 바다에는 물뿐인데, 물뿐인데, 그 바닷물 속에 온갖 삼라만상의 모양들이 다 비춰져요. 근데 그 바닷물 속에 비춰지는 모양은 없는 거예요. 물뿐이에요. 그러면 티끌도 보이고, 세계도 보이고, 삼천대천세계도 보이고, 무량수 일체 법의 세계가 보이는데, 그 세계는 티끌에는 티끌에 자성이 없고, 세계에는 세계의 자성이 없어서, 그걸 딱 비추어 보는 지혜 광명뿐이다.
          아 이거, 막 속이 뒤집어지지 않으면 잠이 와야 되는 내용인데요. 속 뒤집어지든지 잠 오든지 둘 중에 하나가 돼.

 

         바다에 가서 보면 그림자가 보이는데, 그 그림자 하나하나가 바닷물이에요. 그 그림자 자체가 그 바닷물에 없어요. 그래서 지혜광명으로 딱 비추어 볼 때, 그 지혜 광명 속에 삼천 대천세계 일체중생 삼라만상이 환하게 비추는데, 삼천 대천세계에 삼천 대천세계 자성이 없고, 삼라만상에 삼라만상의 자성이 없고, 일체 중생에게 일체 중생의 자성이 없어서, 이게 전부 자성 없는 법성이다. 무성 법성. 자성 없는 법성이다. 그래서 이게 전부가 무주실상(無住實相)이다. 머무는 데가 없는 진실상이다. 중생도 중생에 머무는 자성이 없고, 하늘도 하늘에 머무는 자성이 없고, 세계도 세계에 머무는 자성이 없어서 전부가 지혜의 광명 속에 비추어지는 삼라만상이다. 이거를 말하는 거예요. 그래서 한 작은 티끌 속에 시방을 다 포함하고 또 티끌티끌마다 다 그러하다. 그러는 거는 지광명조 해인삼매에 딱 들면, 세계는 전부 자성이 없는 무이법성(無二法性), 자성이 없어서 어떤 세계든지 둘이 없고 원융무이한 무이법성이다. 그래서 지광명조로 둘 없는 법성을 딱 보면 일미진중과 이 시방 세계가 다른 게 하나도 없어요. 전부 이 둘 없는 법성이기 때문에. 그래서 둘 없는 법성을 딱 보면 명조자재, 밝게 비추어 보면서 자재를 해요. 자유자재를 해요. 불취불사(不取不捨). 뭐 시방세계라고 취하지도 않고, 함미진중이라고 버리지도 않고, 의식 사량으로 보면 작은 게 있고 큰 게 있어서 버릴 것이 있고 취할 것이 있는데, 지광명조로 딱 보면 큰 거나 작은 거나 똑같이 자성이 없어서 취하고 버릴 게 하나도 없어요. 무슨 소리인지 참 이게. 아득히 먼 옛날얘기 같아요. 근데 이게 이제 사실인 거예요. 지혜광명으로 밝게 비춰 본다. 그러면 지혜광명은 그 특성이 형태에 미혹하는 게 아니라 그 본성을 꿰뚫어 봐요. 형태에 미혹하는 게 아니라 본성을 꿰뚫어 봐. 그러면 형태는 뭐와 같으냐. 예를 들면 구름이 있고, 비내림이 있고, 이슬이 있고, 얼음이 있고, 이게 형태인데, 이 형태를 형태만 보고 쫓아가는 게 의식사량 종종집착이에요. 생각으로 저게 뭐다 생각을 해서 가지가지로 집착하는 게 그게 범부의 세계란 말이야. 그런데 이 지광명조는, 지혜광명으로 밝게 비추는 것은, 비가 내리든 구름이 껴 있든 뭐 얼음이 얼었든 뭐든지 전부 그 본질이 수분이라는 거예요. 물기운. 그래서 구름 버리고 이슬 취하고, 뭐 얼음 버리고 무슨 다른 거 취하고, 그걸 안 해요.
        그래서 명조자재, 밝게 비추어서 그냥 자재할 뿐이에요. 명조자재 불취불사,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고 밝게 비추어서 자유자재한다. 그 세계를 불주 세계라고 그래요. 부처님이 머무는 세계라고. 근데 이거를 생각으로 이렇게 듣고 생각으로 이걸 알아보겠다고 하면 답답해요. , 까 밖에 안 나와요. 그럴까, 정말일까, 가능할까, 요따위 소리를 하고 앉았거든. 그럴 수밖에 없어요. 생각으로 헤아리니까.

         근데 의상 스님이 말씀하셨듯이 일미진중과 시방세계가 각무자성하여 각각 자성이 없어서 동시무주라, 똑같이 같을 동, 이 시. 무주, 머무는 데가 없다. 하늘이 하늘에 머무는 데가 없고, 땅이 땅에 머무는 데가 없고, 자성이 없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진소와 세대가, 이 티끌은 작고 세계는 크다(塵小界大) 그러는 것은, 왜 티끌을 작게 보고 세계를 크게 볼 수밖에 없느냐면 수처수이(須處須耳), 생각하는 곳에서 생각할 뿐이다. 그러면 우리가 자기 생각으로, 예를 들면 집을 하나 짓는데 조그마한 티끌은 작단 말이야. 근데 집 짓는 데는 벽도 필요하고 터도 필요하고 이건 크단 말이야. 그러면 그 집 짓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티끌 하나 붙잡고 있으면 안 돼요. 그 큰 거를 취해야 돼요. 그래서 사람 사람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크다고 생각하고 작다고 생각할 뿐이지, 큰 것에 큰 것이 없다. 작은 것에 작은 것이 없다. 이게 무주예요. 머묾이 없다. 그래서 이걸 생각에서 지혜로 딱 들어가면, 그 크고 작은 형상을 보고, 형상을 집착하는 게 아니라, 그 법성을 보고 법성에 자재한다. 이래가지고 법성은 무이라. 없을 무자 두 이자. 이 둘이 없는 세계를 보는 게 법성을 보는 거예요. 이 생각은 항상 둘을 보게 돼 있어요. 이것 아니면 저거, 하나 아니면 둘. 그런데 이 지혜광명은 항상 둘 없는 법성을 늘 보고 있어요. 무이. 그래서 이 우주만상에서 둘 없는 세계를 보면 그건 법성을 보는 거예요.

 

        죽음에 죽음의 자성이 없고, 태어남에 태어남의 자성이 없으니까 죽고 사는 게 둘이 없는 거예요. 이게 지광명조예요. 지혜광명으로 밝게 비추는 거란 말이에요. 근데 이 생각으로 보면 태어남과 죽는 건 달라요. 엄연히 다르거든. 그리고 죽음이라는 게 뭐냐. 그 종범이 보기에는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고, 숨 못 쉬는 게 죽는 거예요. 죽는 게 뭐냐. 숨 못 쉬면 죽는 거예요. 그러니까 죽었다 하지 말고, 숨 쉬나 그러면 살은 거고, 숨 못 쉰다 그러면 아 죽었구나. 그러니까 엄격히 말하면 숨 못 쉰다 하는 게 맞는 말이에요. 근데 우리는 다 언젠가 숨 못 쉴 날이 오거든요. 그러면 태어나서 숨 쉰 거 하고, 숨 못 쉬는 거 하고 무슨 차이가 있나. 지혜로 보면 차이가 없어요. 무이법성이에요. 이게 둘이 없는 법성이다. 그럼 생각으로 보면 생과 사는 다르다. 그게 이제 현상차별이에요. 현상 하나하나를 다르게 보고, 종종 집착하면, 그게 생각으로 살아가는 범부의 삶이고, 둘이 없는 법성을 딱 지혜로 밝게 봐서 불취불사하고 이걸 취하고 저걸 버리고 그렇지 아니하고, 항상 자유자재하면 그것이 부처님이 머무는 세계다. 이렇게 가르치는 게 이게 화엄경이에요.
        그러니까 죽음을 무조건 싫어할 게 아니라, 죽음의 자성이 뭐냐. 자체 본성이 뭐냐. 오래 삶을 무조건 좋아할 게 아니라 이 오래 사는 자체 본성이 뭐냐. 없어요. 자체 본성이 없어. 그래서 삶에 삶의 본성이 없고, 죽음에 죽음의 본성이 없는 것을 무이법성이라고 그래요. 둘이 없는 법성이다. 이걸 깨달은 세계라고 그래요. 무이법성. 오증세계, 깨달아서 증득한 세계다.

        이게 뭔 소리야. 도대체. 지금 돈을 얼마나 벌어야 되고, 뭘 해야 되고, 뭘 해야 되고 이게 지금 뭐 앞길에 훤히 열렸는데, 둘이 없는 법성이다. 어떻다 하면 이게 이게 죽자는 소리여, 살자는 소리여. 지금 이게 이런 걸 답답하다고 하는 거거든요. 답답하다고 그래요. 그래서 이런 거는 옛날에 큰스님들도 다 지적을 했어요. 이런 법문 하는 거를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리석은 법사다 이랬어요.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리석은 법사다. 왜 그러냐면 이 가지가지 집착을 하면 괴로움이 따르고, 집착을 안 하면 괴로움이 없다라고 보통 법사가 그런 법문 하는데, 그 법사는 어지간히도 어리석은 법사다. 왜 그러냐. 집착을 안 하는 것은 죽기보다도 더 힘들다. 뭐 되는 소리를 해야지. 되는 소리를 해야지. 집착을 안 할 수 없는 소리를 왜 하고 있나. 그렇게 말한 큰 스님도 있어요. 집착을 안 하는 것은 죽기보다 더 힘들다. 그래서 되지도 않은 소리를, 불가능한 소리를 왜 하고 있냐. 그런데 되고 안 되는 건 개인의 문제고, 법이 그러한 건 법의 문제거든요. 그러니까 법사는 법이 그러하면 그러한 법을 말해야지, 안 된다고 말 안 하고, 된다고 말하고 그러면 또 안 돼요. 그렇잖아요. 그러니까 구름하고 비하고 이게 다 다르게 보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구름하고 비하고는 다른 게 아니다. 그러면 그걸 뭐 하려고 그런 소리를 하나 이렇게 생각하지만, 법이 그러니까, 진실이 그러니까 그렇게 얘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중생이 알든 모르든 이거는 현재 각자 중생의 문제고, 법의 진실상은 법의 진실상으로 알려주고, 그렇게 가게 하는 것이 법이다 이거죠. 그래서 의상 스님께서 이런 법성게를 지으신 거예요.

         그래 가지고 둘이 없는 것은 법성이요, 머묾이 없는 것은 실상이다. 법성은 둘이 없고, 머물지 않는 것은, 머묾이 없는 것은 진실상이다. 그러니까 이 물질을 보고 물질에 들어가서 그 뭐를 찾아내려고 하는 것은, 저 물속에 있는 달을 보고 물속에 들어가서 달을 건져내려고 하는 거나 똑같아요. 그래서 중생이 하는 짓이 괴롭게 돼 있어, 가만히 보니까 안 괴로울 수가 없어. 왜 그러냐 하면, 보이는 거를 자꾸 구하니까. 보이는 건 자성이 없어서 구해 봤자 하루만 지나면 또 쓸 데가 없어요. 그게 뭔 소리인가. 좋게 보이던 것도 하루쯤 지나면 딴 걸 또 찾아요. 그건 떠나서. 그러니까 누가 뭐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면 그 바보에요. 왜냐하면 해줘 봤자 내일 되면 또 딴 거 해달라고 할 테니까. 아 진짜요. 내일 되면 또 딴 거 해달라고 그래요. 그다음에 또 딴 거 해달라고 그래요. 해주다 죽지 그러면, 어떻게 살아요. 그게 의식 사량의 세계예요. 의식으로 사량하는 건 그와 같다.

 

如於一微塵 여어일미진 일 미진에서와 같이

一切塵亦然 일체진역연 일체진중에서도 또한 그러하다.

世界悉入中 세계실입중 세계가 다 일미진으로 들어가니

如是不思議 여시불사의 이와 같은 법은 불가사의하다.

 

        그리고 이 일체진중역여시, 일체 하나하나 티끌 속에 시방세계를 다 머금고 있다. 이 세계를 화엄경 보현행품 게송에서 여러 게송으로 말씀을 하고 있는데, 여어일미진(如於一微塵)하야, 하나의 작은 티끌과 같아서, 일체진도 역연(一切塵亦然)이라, 일체의 모든 티끌에도 그와 같다. 세계가 실입중(世界悉入中)하되, 세계가 다 하나의 티끌 속에 들어가니, 여시는 불사의(如是不思議), 이런 거는 생각으로 헤아릴 수는 없다. 지광으로 명조해야 된다. 지혜광명으로 밝게 비추어야 된다 이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이 보이지 않는 가는 티끌과 이 우주 세계가 다름이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우주가 뭘까, 내 몸이 뭘까, 알고 보면 하나의 작은 티끌에 불과하다. 그래서 진리가 뭐냐, 인생이 뭐냐, 삶이 뭐냐, 죽음이 뭐냐, 아주 간단해요. 어떤 선지식은 요 옷에서 먼지 하나 이렇게 잡아서 이렇게 보여줬어요. 이게 인생이다. 이게 삶이다. 이게 죽음이다. 이거예요. 이 티끌 하나 속에 우주만상의 그 실상이 다 들어 있어요. 근데 이거를 생각으로 놓치기 때문에 맨날 눈 뜨고 보면서도 모르는 거예요. 답답하네. 진짜 이거 답답 답답해.

 

一一塵中有 일일진중유 일일의 미진 속에

十方三世法 시방삼세법 시방삼세의 법이 있고

趣刹皆無量 취찰개무량 중생세계와 찰토세계가 다 무량하나

悉能分別知 실능분별지 모두 분별하여 안다.

 

        그래서 또 일일진중에 하나하나 티끌 속에 시방삼세법이 있으니, 하나하나 티끌 속에 시방 삼세법(十方三世法)이 다 있다. 시방은 온 우주 아니여, 3세는 오랜 시간 아니에요. 이 하나하나 티끌 속에 오랜 시간과 온 우주가 다 있다, 있으니, 그다음 뭐예요? 취찰이 개무량(趣刹皆無量)하고, 그 하나 하나 티끌 속에 중생이 사는 육취(六趣), 지옥 · 아귀 · 축생 · 인간 · 천상 · 아수라, 이런 육취의 세계가 다 있고, 또 시방 불찰, 시방 찰토, 시방의 국토 세계가 한량없이 많으나, 실능분별지(悉能分別知). 이 지혜광명으로 그 많고 많고 넓고 넓은 세계를 끊임없이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알 수 있는 게 있어요. 그게 지혜광명으로 밝게 비추는 거다. 그러니까 이 시방삼세가 길고 넓다 하나, 이 지혜광명으로 보면 이 손바닥에 무슨 티끌 하나 보는 거와 마찬가지다 이거지. 이 지혜 광명은 시방으로도 헤아릴 수가 없고, 삼세로도 헤아릴 수가 없어서, 시방 삼세를 보는 게 지혜광명으로 보면 손바닥에 가는 티끌 하나 보는 거와 다름이 없다 이거예요. 이게 화엄경이에요.

         그러니까 이게 생각으로 헤아리면, 이게 물건인데, 물건인데, 이거는 필요하면 내가 취하고 필요 없으면 버려야 되잖아요. 그래서 맨날 시장에 가서 물건을 사오기도 하고, 맨날 이 쓸모없는 물건을 버리기도 하잖아요. 그게 우리 생활이에요. 사오고 버리고, 사오고 버리고. 요새는 보면요. 멀쩡한 물건도 길바닥에 많이 버려요. 그렇거든. 그 왜 버리냐. 쓸모가 없어서 버리는 거예요. 그리고 시장에 가면 물건 산다고 난리야. 그냥 누가 사갈까 봐, 먼저 사려고 막 돌아다니고 그러더라고. 그 희한하데 그게. 전쟁터 같아요. 그 뭐 좋다 싶으면 그냥 막 줄을 서고, 막 미리 뛰어가고 막 이래요. 그런데 이 지혜 광명을 보면 이게 마음이에요. 마음이에요. 마음. 이게 물건이 아니라 마음이에요. 시방 삼세가 유시일심(有是一心)이라, 오직 한 마음이다. 그럼 생각해 보세요. 이 물건이 나한테 보이기 위해서는 이 물건을 보는 놈이 뭐가 있어야 되잖아요. 이거 뻔한 건데 그거 이상하게 생각된다고. 이 물건을 보는 놈이 없으면 이 물건을 어떻게 이걸 취하기도 하고 버리기도 하냐고. 그러니까 물건을 밖에 가서 사오는 것도 그 물건을 보는 놈이 있기 때문에 사 오고, 이 물건을 버리는 것도 이 물건을 보는 놈이 있으니까 버리는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모든 게 마음이다. 저 하늘을 떡 보는데 하늘이 저기 있단 말이에요. 그러면 하늘이 있는 걸 보는 놈이 있어요. 사람이 저기 있다. 그러면 사람이 있는 걸 보는 놈이 있어. 그거는 얼마나 크고 얼마나 오래 가는지 이 시방 삼세로도 헤아릴 수가 없어요. 그걸 지광명조라고 그래요. 지혜광명이 밝게 비춘다고. 그놈 하나 찾으면 문제될 거 하나도 없는 거에요. 하늘을 볼 때 하늘을 보는 마음이 있고, 땅을 볼 때 땅을 보는 마음이 있고, 사람을 볼 때 사람 보는 마음이 있고, 물건을 볼 때 물건 보는 마음이 있다. 그렇다고 마음이 하늘이냐? 하늘도 아니야. 마음이 땅이냐? 땅도 아니에요. 마음이 사람이냐? 사람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물속에 많은 걸 갖다 대면, 사람이 가면 사람이 나타나고, 물건을 대면 물건이 나타나고, 뭐 나무를 대면 나무가 나타나는데, 나타나기는 나타나지만, 물은 나무도 아니고 물건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거든. 그걸 지광명조라고 그래요. 지혜광명이 밝게 비춘다고. 이런 소리를 해서 불교를 어렵다고 하는 것 같더라고, 가만히 보니까. 이게 뭔 소린지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니까, 불교를 어렵다고 하는 것 같아요. 근데 그게 어려운 게 어려운 게 아니라, 내가 생각으로 집착하니까 어렵지, 지혜로 돌아가 보면 너무너무 쉽고 너무너무 당연한 거예요. 너무 당연한 거예요. 모르면 어렵고 알면 쉬운 거예요. 그러니까 어렵다, 쉽다 말하면 안 맞는 말이고, 내가 아느냐 모르느냐. 다 내가 모르는 건 어렵다고 그래요. 내가 아는 건 쉽다고 그래요. 그래서 어렵고 쉬운 게 나한테 있는 거지. 불교가 어려운 거 아니에요. 당연한 거예요. 지혜로 보면 일체가 마음이고, 생각으로 보면 일체가 물건이다. 그럴까 진짜? 진짜일까? 이게 그럴까.

 

一一塵中有 일일진중유 일일의 미진 속에

無量種佛刹 무량종불찰 무량종의 불찰이 있고

種種皆無量 종종개무량 종종마다 모두 불찰이 무량하나

於一無不知 어일무부지 하나에서 알지 못함이 없다.

 

        그다음 또 게송도 있는데 일일진중에 하나하나 티끌 속에, 무량종종찰하니, 하나하나 티끌 속에 한량없는 가지가지 세계가 있다. 가지가지 세계가 있다. 그러면 가지가지 세계에도 자성이 없고, 하나의 티끌도 자성이 없어서 무이법성이다. 둘이 없는 법성이다 이거지. 그래서 종종이 개무량(種種皆無量)하나, 가지가지가 다 한량이 없으나, 어일무부지(於一無不知), 가지가지가 한량이 없으나, 하나에서 한 티끌에서 알지 못하는 것은 없다. 하나만 보면 모든 걸 다 알 수 있다 이거죠. 어일무부지라, 하나에서 알지 못하는 것은 없다. 그러니까 누가 법을 모르면 필요 없어요. 이런 거 하나(안경을 들어보이시며) 이렇게 보여주면 돼요. 여기에서 알지 못할 건 하나도 없어요. 어일에 무부지라, 하나에서 알지 못할 건 없다. 그거 뭐 이리저리 설명해야 억만년을 설명을 해도 생각이 변하지 아니하면 몰라요. 그러니까 요즘 뭐 대화와 소통이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대화한다고 소통 안 돼요. 안 돼요. 안 돼요. , 왜 안 되냐. 각자 살아온 길이 달라서 안 돼요. 안 돼요. 그래서 내가 볼 때는 나한테 묻지 말고 네가 해봐라. 니가 해봐라. 물어봐야 안 된다. 물어봐야 나는 내 말 할 것이고, 너는 네 소견으로 들을 것이고, 듣는 소견이 말하는 사람 소견하고 달라서 안 통해요. 그거는 생각 안 하고 뭐 가르쳐 달라고 그러는데 말한다고 안 돼요. 그러니까 이런 거(안경) 하나 떡 하니 어일무부지니까, 하나에서 알지 못할 건 없으니까, 이거 기가 차네. 이게 기가 차.

 

了知非一二 요지비일이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고

非染亦非淨 비염역비정 물든 것도 아니고 깨끗한 것도 아니며

亦復無雜亂 역부무잡란 또한 섞여서 어지러운 것도 아니니

皆從自想起 개종자상기 다 자기 생각으로부터 일어났음을 안다.

(80화엄경 보현행품 게송)

 

 

        그래가지고 마지막에 또 무슨 게송이 있느냐면, 이 법성 실상은 법성의 진실상은 비일이(了知非一二). 하나냐, 하나에도 자성이 없고, 하나에도 머묾이 없으니까 하나도 아니다. 둘이냐, 둘도 아니다. 둘에도 자성이 없고 둘에도 머물지 아니하니까 둘도 아니다. 그러면 물들어서 더러운 거냐. 더러운데도 자성이 없으니 더러운 것도 아니고. 깨끗한 거냐, 깨끗한데도 자성이 없으니까 깨끗한 것도 아니고. 그러면 이게 막 뒤섞여서 막 어지러운 거냐. 그것도 아니다. 그럼 뭐냐. 하나다 둘이다, 물들었다, 깨끗하다, 섞였다, 어지럽다는 것은 개종자상기(皆從自想起). 다 자기 생각으로부터 일어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일체 만물은 무이법성이고 무주 실상인데, 둘 없는 법의 본성이고 머묾이 없는 진실상인데, 중생이 이 의식 사량으로 좋다는 생각도 일으키고, 나쁘다는 생각도 일으키고, 하나라는 생각, 둘이라는 생각, 물들었다는 생각, 깨끗하다는 생각을 일으키고 뒤섞였다, 혼란스럽다 이런 생각을 일으키는데, 이런 거는 다 자기 생각으로부터 일어난 거지, 법성에는 없다 이 소리예요. 그래서 무법 유심이라. 법은 없고 오직 마음이다. 그러니까 깨달은 분은 마음 하나밖에 없어요. 오직 마음이니까. 이것도 마음이고, 몸도 마음이고, 하늘도 마음이고, 태어난 것도 마음이고, 죽는 것도 마음이고, 전부 마음이다. 삼계소유가, 삼계에 있는 바가 유시 일심이라, 오직 유자, 이 시자, 일심, 한 마음이다(三界所有 唯是一心). 이게 화엄경이거든요. 화엄경 십지품의 말씀인데, 그래서 어두운 걸 보고 두려워할 때 어두운 걸 보는 놈이 있단 말이여. 밝은 걸 보고 좋아할 때 밝은 걸 보는 놈이 있어요. 그 보는 놈은 밝은 것도 아니고 어두운 것도 아니여. 시방도 아니고 삼세도 아니에요. 그런데 모든 걸 다 거두어 삼키고도 남아요. 그래서 그걸 해인삼매라고 그래요. 그래서 모두가 다 지혜광명 속에서 이게 보이는 거지, 이것 자체에 자성이 없다.
        그런데 이걸 생각으로 집착을 하면 집착하는 대로 이게 다 달라져 보이는 건 사실이에요. 물속에 있는 달인데, 이 물속에 있는 달을 보고도 밝다. 무슨 둥근 달이다. 초생달이다. 얼마든지 이걸 물속에 있는 달을 보고 소설을 한 권 쓸 수도 있거든요. 이게 생각이에요. 바다를 떡 보고 그 바다가 자기 마음인데, 그걸 자기 밖에 바다가 있는 줄 알고 바다를 떡 보고 망망대해라. 넓고 넓은 큰 바다다. 파도야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이런 소리 하고 있단 말이에요. 그럴 수밖에 없어요. 자기 마음 밖에 바다가 있다라고 지금 눈앞에 보이거든. 근데 바다는 자체가 없고, 그 바다를 바라보는 마음뿐이다.

 

         그래서 내가 이 법문을 듣고 되게 기분도 나쁘고 아주 억울했었는데, 한 번은 여름인데 선요를 배우다가 안신입명(安身立命)이라는 말이 나와, 몸을 편안히 하고 명을 세운다. 몸 편안히 하고 명 세운다라는 게 이게 맹자에 있는 말인데, 여기 또 나와 있어요. 이게 도대체 뭔 말인가. 그래서 내가 더운데 점심 먹고 바로 땀을 흘리면서 그 극락암을 올라가서 경봉 큰스님을 뵙고 물어본다고, 그 온갖 힘을 다 들여가지고 땀 흘려 올라갔는데, 그 뒷마루에 그때 시원한데 거기 계시더라고. 그래서 인사를 드리고 하나 여쭙겠다, “뭐냐, “선요에 편안할 안, 몸 신, 세울 입, 생명 명, 안신입명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 안신입명이 뭡니까?” 이래 물었거든. 그런데 기가 차게 억울한 소리를 하더라고요. 거기에 대해서는 선요에 대해서는 설명도 없고, 그 낱말에 대해서는 전혀 말씀이 없고, “너 지금 안신입명이라 하고 묻고 있는데, 그 안신입명이라고 묻는 그놈이 뭐냐”, 이래요. 내가 모르지. 몰라. 그러니까 아주 모르긴 모르는데, 너무 그냥 앞이 캄캄하더라고요. 조금 있더니 이제 깨어났어. 앞이 캄캄한 데서 깨어났어. 내가 이 말 들으러 여기 온 게 아닌데, “안신입명에 대해서 무슨 설명해 주고, 해설을 듣기 위해서 왔지. 안신입명이라고 묻는 그놈이 뭐냐, 그 말 들으라고 온 게 아닌데 왜 이렇게 말씀하시나요?” 아주 속이 상해서 그냥 며칠 동안 아주 억울했어요. 나 왜 갔나, 거기. 그 말 들으러 간 게 아닌데. 그런데 설명을 억만년을 해봐도 설명은 설명이에요. “뭐 다른 뜻이 없습니까?” 또 이리 나오거든. “스님께서 말씀하신 게 맞습니까?” 이래 나오고요. “다른 사람은 그렇게 말 안 할 건데요.” 이래 나오고. 한없이 설명해도 듣는 사람이 안 받아들이면 끝이에요. 그러니까 이 가르침 중에 이 가르침이 최고예요. 최고. 대답을 하려고 하지 말고, 묻는 그놈을 알게 하라. 질문에 대답하지 말고, 질문하는 그 자체를 알게 하라 이거예요. “저게 뭡니까?” 하고 물으면 저게 뭐 이름은 뭐고 어쩌고 그거 하지 말고, “저게 뭡니까 하고 묻는- 조금 전에 뭐라고 그랬죠?- 묻는 그놈이 뭐냐그거예요. 그러니까 저게 뭡니까? 이게 뭡니까? 그럼 이게 뭐라고 대답하지 마라. 이게 뭡니까 하고 묻는 그놈이 뭐냐.
마치겠습니다.